동시상영관 2024. 3. 8. 13:03

패스트 라이브즈 / 인연(因緣)

 

살아보니 멀어질 사람은 어떻게 해도 멀어지고 곁에 남을 사람은 절로 남게 되는 게 인연(因緣)인 것 같더군요. 인연이란 사람의 의지가 닿을 수 없는 영역입니다. 남녀 관계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12살의 나영과 해성은 수업을 마치면 늘 함께 하교하는 초등학교 단짝 친구입니다. 아마도 그때는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서로가 몰랐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것은 계속될 것만 같던 상황이 어느 순간 시간의 절벽에 다다른 후입니다. 나영이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12년 뒤, 대학생이 된 해성(유태오)은 나영(그레타 리)을 찾아냅니다. 찾아서 직접 만났다는 말이 아니고 전 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된 시대라 온라인으로 만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첫사랑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만, 두 번째 인연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다시 12년이 흘러… 해성은 작가로 성장한 나영을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납니다. 두 사람의 세 번째 만남은 과연 어떤 인연일까요?

 

 

곧 있을 미국 아카데미 어워즈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두 개 부문에 수상 후보로 노미네이션된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는 한국계 캐나다인인 셀린 송 감독의 첫 작품입니다. 이로써 2020년의 ‘기생충’ 2021년의 ‘미나리’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인 또는 한국계 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누구나 첫사랑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며,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것입니다. 영화 속의 해성과 나영은 그 누구나의 마음을 저격한 것이죠. ‘오펜하이머’로 함께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패스트 라이브즈’를 최근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좋았다며 극찬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놀란 감독의 마음 한구석에도 첫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제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의 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오래전에 ‘썸’을 조금 타던 여성이 이민 간 곳으로 발령받은 소설의 주인공이 그 여성을 만나는 상상을 하는 장면인데, 물론 허구입니다만 여성의 실존적 모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은 아니고 복수의 인물이 믹스된 캐릭터인데, 어쨌든 제 첫사랑(?)도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게는 ‘패스트 라이브즈’가 남의 일 같지만은 않더라구요. ㅎㅎ

 

 

영화의 제목인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를 지나간 삶 즉 전생(前生)으로 해석하더군요. 아마, 단짝 친구이던 나영과 해성의 초등학교 시절이 전생이라면 그 시절을 그리워한 기간은 현생에 해당하지 않을까요? 영화에서는 현실에서 나영과 해성이 만났기 때문에 애매합니다만, 제 소설에서는 두 사람의 만남을 상상으로 처리했으므로 그 만남은 꿈 같은 다음 생애 즉 내생이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패스트 라이브즈’도 나영과 해성의 초등학교 시절, 그리워한 기간 그리고 재회의 3부작인 만큼 전생, 현생, 내생의 구조는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영과 해성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는 라스트 씬은 긴 여운이 남습니다. 여운만큼 이들의 인연이 길게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든 관객은 저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영화는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 작품이라고 합니다. 극중 나영과 셀린 송 감독의 나이가 일치합니다.(‘넘버 3’를 연출한 송능한 감독의 딸인 셀린 송 감독은 1988년생으로 나영처럼 어려서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고 합니다)

 

나영을 연기한 그레타 리는 LA 출생의 한국계 배우입니다. 알지 못했는데, 그동안 ‘머니 몬스터’, ‘코블러’, ‘위아 영’ 등 우리에게도 알려진 여러 할리우드 작품에 조연으로 출연한 경력이 있더군요. 해성 역의 유태오는 독일 출생의 우리나라 배우로 이번 출연으로 영국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외모가 젊은 날의 주윤발을 빼닮았습니다.

 

전 세계 영화제에서 212개 부문에 노미네이션 되어 무려 72관왕을 차지했다는 ‘패스트 라이브즈’의 신화가 왕중왕을 가리는 미국 아카데미에서도 이어질까요?

 

202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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