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트 바이어런트
가장 잔인한 형벌은 서서히 죽이는 것이다 - 블루 하이웨이 -
JC 챈더, 지금까지 단 세 편의 영화를 연출한 신진 감독입니다. ‘마진 콜’(2011), ‘올 이즈 로스트’(2013) 그리고 ‘모스트 바이어런트’(A Most Violent Year, 2014). 그런데 이 세 편이 모두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전작들인 ‘마진 콜’이나 ‘올 이즈 로스트’에서 보여줬듯 JC 챈더는 서사가 꽤 불친절한 감독입니다. 자본시장의 비정한 생리를 고발한 ‘마진 콜’은 표현 방법이 너무나 건조해서 마치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올 이즈 로스트’는 심지어 단 한마디의 대사조차 없습니다.
이런 JC 챈더가 석유회사를 운영하는 이민자의 이야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1981년은 미국 역사에서 범죄율이 가장 높았던 해였다고 합니다.
그 해 집권한 레이건 행정부는 베트남과 이란주)에서 실추된 미국의 이미지를 제고하고자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팍스 아메리카나 정책을 추진합니다. 그 결과가 그라나다 침공(1983)이나 리비아 폭격(1986) 등으로 나타나죠. 미국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걸 전 세계에 확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당시는 실베스터 스탤론이 람보 시리즈를 통해 미국 만세를 부르짖고 있었는데 묘하게도 영화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일이 현실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레이건 대통령을 ‘람보 레이건’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정부규제 완화와 기업활동의 자유 확대 등 소위 ‘레이거노믹스’를 강력하게 추진하며 시장 자율의 메커니즘을 확대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망령이 되어 떠돌고 있는 경쟁지상의 신자유주의의 시작이었죠. 정치․경제적으로 완전한 보수주의로 회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아계나 히스패닉 등에게 미국은 드림랜드였습니다.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고 필요한 건 가질 수 있는.
아벨 모랄레스(오스카 이이작)는 필요한 건 갖는 게 삶의 신조인 이민자입니다. 먹고 살 일이 막막하다 보니 어떻게 뒷골목에서 출발했을 거고 그러다보니 어쩌다 마피아 두목의 딸인 안나(제시카 차스테인)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엿한 자기 사업으로 석유회사를 경영하는 그는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거액을 들여 땅을 사들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의 석유 수송 트럭이 자꾸만 강도를 당하고 검찰에서는 여러 가지 혐의를 잡아 그를 기소하려고 합니다.
평판이 나빠지자 돈을 빌려 주기로 했던 은행이 약속을 철회하고 아벨은 심한 자금 압박을 받습니다. 드디어 아벨은 사채도 끌어 쓰고 매제에게도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런 남편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던 안나는 아벨이 생각지도 못했던 거액을 선뜻 내놓습니다. 물론 사정이 있는 돈입니다. 안나는 어떻게 이 돈을 마련했을까요?
이민자 출신으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아벨은 선천적으로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한 밤중에 고속도로를 달리다 사슴을 친 그가 내려서 처리를 주저하자 마피아의 딸답게 안나가 망설임 없이 해결해 버리죠.
나름 정도경영을 한다고 애쓰지만 세상은 아벨이 바른 걸음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아니 길이 삐뚤게 나있는데 어떻게 똑바로 걸을 수가 있겠습니까?
심한 자금 압박을 받은 그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평생 갱스터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갱스터에게 먹히게 되었다고.’
나무가 바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것입니다. JC 챈더는 끝내 세상과 타협하고 마는 아벨의 모습을 심심하게 보여줍니다.
‘모스트 바이어런트’의 서사는 제목과는 달리 느린 호흡에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느와르로 분류되어 있지만 석유 수송 트럭이 강도를 당하다는 것 외에 구체적인 범행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아벨의 목을 서서히 짓누르는 주체는 다름 아닌 이 세상입니다. 실제로 1981년에 범죄율이 최고조에 달했는지는 모르지만 ‘활극의 시대’를 배경으로 JC 챈더는 보이지 않는 폭력의 무게를 어두운 화면에 담아냈습니다.
주) 1979년 일어난 이란 미국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 카터 행정부는 이를 군사적으로 해결하려다 실패하고 미국은 망신살을 뻗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