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상영관/홍상수전

밤과 낮 / 파리의 밤은 서울의 낮과 같다

블루 하이웨이 2015. 9. 10. 22:42

 

 

파리의 여름은 오후 열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다.

 

해가 지지 않은 오후 열시. 과연 밤일까 낮일까?

 

대마초를 피우다 들킨 40대 화가 김성남(김영호)은 파리로 도피한다. 처벌을 받는 게 겁이 나 무작정 파리로 오긴 했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파리에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민박집 주인(기주봉)의 친절로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유학생 현주를 소개 받은 성남은 현주의 룸메이트 유정(박은혜)에게 강하게 이끌린다.

 

그런데 유정은 성남이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옛 연인 민선과도 알고 지내는 사이. 성남과의 추억을 살리고 싶은 민선과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성남의 연인이 되길 원하는 현주는 유정에 대해 이기적이라는 험담을 늘어 놓지만 성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정에게 매달린다.

 

도피 생활은 잊고 파리에서 유정과 달콤한 로맨스를 즐기던 성남은 하지만 아내의 전화 한 통에 급거 귀국길에 오르게 되는데..

 

 

 

 

'밤과 낮'(2008)은 홍상수 감독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해외에서 쵤영된 작품이다. 파리에서의 씬이 분량의 80%를 넘는다. 하지만 개선문이나 에펠탑 같은 관광 명소를 배경으로 찍은 장면은 없다.

 

성남과 유정의 데이트 장소로 활용되는 노르망디 해변을 제외하면 카메라의 시선은 줄곧 허름한 민박집이 있는 파리의 뒷골목 근방을 맴돈다.

 

 

 

 

'밤과 낮'은 형식에 있어 홍상수가 즐겨 쓰는 대구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작품이다.

 

동일한 사건을 두 사람의 시각으로 보여 준 '오 수정'(2000) 이후 홍상수는 옴니버스 작품인 '옥희의 영화'(2010)'낮선 나라에서'(2011)를 제외하고는 줄곧 대구적 구조를 사용해서 영화를 직조했다.

 

하지만 '밤과 낮'에서는 비슷한 사건을 반복적으로 풀어놓는 대신에 일기 형식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나열하고 있다.

 

따라서 날마다 발생하는 각 에피소드들은 어떤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남의 감정에 따라 즉흥적으로 발생하는 이야기들이다.

 

이 처럼 대구적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밤과 낮'은 대구적으로 읽힌다.

 

성남이 돌연 귀국을 결심한 것은 임신했다는 아내(황수정)의 전화를 받고 나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임신했다는 아내의 말은 남편을 부르기 위한 거짓말이다.

 

그런데 성남이 파리에서 만난 여자 유정도 귀국하는 성남에게 임신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또 성남의 옛 연인 민선은 성남에게 과거에 중절 수술을 여섯 번이나 받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실일까?

 

 

 

 

길에서 우연히 민선과 마주쳤을 때 성남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쩌면 민선은 미래의 유정일 수도 있으며 유정은 과거의 민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은 다른 것 같지만 사실 같은 세상이다. 밤은 낮의 대구이며, 낮은 밤의 대구다. 이 작품의 제목은 이 처럼 절묘한 대구 관계를 이루고 있다.

 

서울로 돌아온 성남은 아내와 함께 누워 엉뚱하게도 파리에서 만난 유학생 지혜의 꿈을 꾼다. 지혜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성남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유학생이다. 성남은 그녀로부터 유정이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가 학교에서 퇴학 당한 사실을 듣게 된다.

 

성남은 꿈에서 지혜를 학대한다. 꿈 속에서 성남은 자신이 아끼는 도자기를 들고 누군가를 찾아가는데 그만 지혜가 그 도자기를 깨버리자 불 같이 화를 낸다. 성남이 찾아가던 상대는 아마도 유정일 것이다.

 

 

 

이유정 역의 박은혜가 홍상수 영화에 출연한 것은 지금까지 이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박은혜는 이기적이지만 남자에게 모든 것을 주고 한 순간에 무너지는 유정이 역할을 100% 소화하고 있다. 박은혜의 연기는 유정이 역을 연기한 게 아니라 박은혜로서 출연했다고 할 만큼 자연스럽다.

 

파리의 밤은 서울의 낮과 같다. 밤은 낮이고 낮은 밤이다. 이 세상은 무슨 색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