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 / 중년의 뱀
연극배우 마리아 엔더스(줄리엣 비노쉬)는 자신을 세계적인 배우로 만들어 준 출세작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 작품에 출연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러나 오늘의 자신이 있게 한 여주인공 시그리드 역이 아닌 시그리드로 인해 파멸하는 늙은 헬레나 역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중년의 여배우란 어떤 모습일까? 카메라는 더 이상 그녀를 쫓지 않는다. 들어오는 배역은 억척 어머니. 시어머니 역이 아니면 다행이다. 스캔들? 젊었을 때는 스캔들 날까 두려웠지만 이젠 누가 좀 내줬으면 좋겠다.
제작자나 투자자가 한 잔 더 하자고 권하면 겉으로야 '됐거든'이라고 하지만 돌아서면 핸드폰만 만지작거린다. 그러다 쥐고 자기 일쑤다.
20년이 지났어도 마리아 자신은 여전히 시그리드다. 하지만 세상은 이제 그녀를 헬레나로 본다.
늙은 여배우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바로 잊혀지는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젊은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과 알프스의 실스 마리아로 들어가서 연기 연습을 시작한다.
무당도 신명이 나야 춤을 출텐데 맘에 안 차는 배역을 맡았으니 연기가 나올 리 없다. 짜증은 짜증대로 나고 시그리드 역을 대신해주는 발렌틴과는 사사건건 부딪힌다.
게다가 시그리드 역을 맡은 배우는 헐리웃의 떠오른는 신성 조앤 엘리스(클로이 모레츠)란다. 뭐하는 계집애인가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마약에 섹스에 폭력에 아주 가관이다.
'이런 쓰레기 같은 년이 나의 시그리드 역을 맡는다니..'
하지만 이런 마리아의 반응과는 달리 조앤은 함께 연기할 대선배를 뵙는다고 알프스로 찾아온다. 이즈음 시그리드 역을 대행하면서 갈등이 고조된 발렌틴은 비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는데..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2014)는 이중극이다. 이 영화에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늙은 여배우 마리아와 그녀의 비서인 발렌틴 그리고 극에서 마리아의 자리를 빼앗은 조앤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마리아와 조앤의 긴장 구조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마리아와 발렌틴의 갈등을 위주로 그려간다. 발렌틴은 현실에서 마리아를 도와주는 존재이지만 언제부턴지 마리아는 발렌틴을 조앤과 동일시한다.
정작 조앤은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출연을 한다. 그런데 조앤과 마리아가 만난 자리에 늘 그림자처럼 마리아를 따라다니던 발레틴은 없다.
영화는 극 중에서 마리아와 조앤의 연기 대결을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지 않는다. 대신에 함께 연기 연습을 하는 마리아와 발렌틴의 갈등을 부각시킴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암유를 시도하는 동시에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마리아와 발렌틴은 현실 속의 관계다. 반면에 마리아가 맡은 헬레나와 조앤이 빼앗은 배역 시그리드의 관계는 허구의 관계이다. 하지만 뒤틀려진 마리아와 발렌틴의 관계는 현실을 허구처럼 보이게 만든다. 즉 현실이어야 할 마리아와 발렌틴의 관계가 허구 속의 헬레나와 시그리드의 관계로 변환한 것이다.
반면 허구이어야 할 헬레나와 시그리드의 관계는 현실을 냉정하게 비춘다. 이와 같이 허구 속의 관계는 현실을 투영하고 현실은 허구와 뒤섞이며 영화는 추락하는 여배우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제대로 건져 올린다.
실스 마리아는 알프스 지방의 지명이기도 하지만 극중 주인공의 이름(마리아)이기도 하다. 실스 마리아는 남쪽 지방에서 뱀처럼 밀려오는 운무가 장관인데 마치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마리아의 어지러운 심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발렌틴 역의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비록 골든 라즈베리가 애정하지만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연기파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배우임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