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미 : 내 마음 속의 또 다른 나
역사학과 교수인 아담(제이크 젤렌할)은 DVD를 빌려보다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조연배우를 발견하고 호기심을 가진다.
크레딧에 올라온 배우들의 이름을 검색해보던 아담은 무명 배우의 이름이 앤서니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를 찾아보기로 한다.
앤서니의 집으로 전화를 건 아담은 그의 아내의 반응을 통해 자신과 앤서니가 목소리도 같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앤서니를 만난 아담은 앤서니의 제안으로 역할을 바꾼다. 아담의 여자친구 메리(멜라니 로랑)에게 매력을 느낀 앤서니는 메리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앤서니를 자신의 집으로 보낸 아담은 앤서니의 집으로 가서 임신한 그의 아내 헬렌(사라 가돈)과 동침하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한편 앤서니와 격렬한 정사를 나누던 메리는 그의 손가락에서 반지자국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밖으로 뛰쳐나가고 하룻밤의 역할 변경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는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처럼 '에너미'(Enemy, 드니 빌뇌브 감독, 2013)는 영화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마치 꿈을 꾸듯 각종 상징적 장치로 가득합니다.
아담의 이야기로 시작한 영화는 앤서니가 등장하면서 이 영화가 아담의 이야기인지 앤서니의 이야기인지가 모호해집니다. 기본 플롯을 따라가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담이고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담의 꿈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아담은 여자친구인 메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둘의 관계는 번번이 조용하게 진행됩니다. 메리는 아쉬운 아담을 뒤로 하고 관계 직후 떠나버리죠.
그러나 아담의 역할을 한 앤서니는 메리를 격렬하게 사랑합니다. 아담은 낡은 볼보를 몰지만 앤서니는 바이크를 타고 다니죠.
이만하면 아담의 꿈에 나타난 앤서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해 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해석되어지면 영화가 너무 심심하죠.
이 영화에서 앤서니를 아담의 도플갱어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고 봅니다.
즉 앤서니가 아담의 도플갱어가 아니라 아담이 꿈꿨던 앤서니의 삶이 실은 아담 자신의 삶일 수도 있다는 말이죠.
대학교수인 아담은 좋은 집에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처럼 설정되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담의 집보다 삼류배우인 앤서니의 집이 훨씬 화려합니다.
즉 앤서니의 집은 실제 아담의 집이며 앤서니의 아내인 헬렌은 아담의 아내인 거죠. 영화의 초반에 회원제 클럽에서 아담이 벌거벗은 여체를 응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임신한 여성이 벌거벗고 등장하죠.
저는 이 장면이 명백한 꿈이라고 봤습니다. 임신한 여성은 아내 헬렌이며 벌거벗은 여성이 밟은 거미는 욕망이 거세된 아담 자신이라고 보여집니다.
▲ 욕망의 거미
그런데 묘한 것은 비밀클럽을 방문한 것이 아담인지 앤서니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담이어야 하는데 나중에 앤서니의 아파트를 찾은 아담이 열쇠가 없다고 하자 문을 따주던 경비원이 아담을 앤서니라고 생각하고 그 곳에 한번 더 가보자고 하죠.
이 때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한 아담은 상황을 얼버무리죠. 그렇다면 앤서니가 아담의 도플갱어가 아니라 반대로 아담이 앤서니의 도플갱어일 수도 있다는 말이죠. 경비원과 함께 클럽에 간 것은 앤서니이며 앤서니는 그 곳에서 거세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메리라는 헬렌을 빼닮은 가상의 여성과 거칠게 섹스를 하는 거죠.
나중에 차 사고로 앤서니와 메리는 죽고 아담과 헬렌만이 남죠. 메리는 손가락의 반지자국을 보고 앤서니를 거부합니다만 헬렌은 아담이 남편인 앤서니라고 믿습니다. 앤서니=아담이라고 볼 때 결국 사라진 건 메리 뿐입니다. 즉 메리와 앤서니의 죽음은 아담 혹은 앤서니가 자신의 꿈을 깬 것을 의미하죠.
내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나비가 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이 영화의 원작은 주세 사라마구의 소설 '도플갱어'라고 합니다. 자기분신을 의미하는 도플갱어라는 제목이 에너미보다는 영화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잘 전달합니다. 하지만 '나의 가장 큰 적은 나'라는 관점에서 보면 에너미라는 제목이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질 소지도 있어 보입니다.
영화 속에서 아담 혹은 앤서니는 한 사람의 자기분신을 만났지만 우리 마음 속에는 도대체 몇 명의 또 다른 내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는 다중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주변에서 보면 상황논리에 따라 너무 쉽게 자신을 바꾸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빙의라고 하는 '해리성 인격장애', 그게 정신의학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