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 / 누군가의 고기
‘돼지의 왕’(2011)은 실사영화 ‘부산행’으로 칸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며 기대를 모으고 있는 연상호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작이다.
대필작가로 근근이 살아가는 종석은 어느 날 중학교 동창 경민의 전화를 받는다. 벤쳐기업 CEO가 되어 15년 만에 자신 앞에 나타난 경민은 중학생 시절의 그 울보 경민이가 아니다.
대폿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두 친구는 중학교 다닐 때 친구 철이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버지가 유흥주점을 운영하는 덕에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게 살던 경민과 넉넉하지 못한 집안의 정석은 단짝 친구가 된다. 경민과 종석은 같은 반의 어깨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어깨들은 선배들의 비호를 받으며 각종 못된 짓을 일삼기 때문에 누구도 나서서 건드리지 못한다.
불평등한 평화는 철이에 의해 금이 간다. 철이는 경민과 종석을 괴롭히는 못된 어깨들을 혼내주며 낡은 평화 질서에 금을 내지만 세상의 복원력은 빠른 속도로 틈을 메웠다.
이상한 건 선생님들이었다. 선생님들은 항상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치우친 판단을 내렸다. 그 결과 번번이 학교에서 징계를 받는 쪽은 원인을 제공한 어깨들이 아니라 어깨들에게 주먹을 휘두른 철이였다.
오래 전에 집을 떠난 아버지가 죽어 나타난 날 철이는 또 다시 경민이를 건드리는 어깨들과 싸우다 퇴학을 당한다.
거리를 헤매던 철이는 유흥주점 앞에서 사장에게 폭력을 당하는 엄마를 발견하고 주머니에서 칼을 꺼낸다. 사장은 바로 경민의 아버지였다. 그 때 들려오는 목소리, ‘철이야~’
경민이가 철이를 다시 본 건 전교 조회 시간이었다. 그 때 옥상 위에 나타난 철이. 경민이는 사람이 옥상에 있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얼른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 후 누구도 철이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학교에는 이상한 평화가 찾아 왔고 경민이와 종석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채 학교를 졸업했다.
그렇게 15년의 세월이 지나 경민이 종석을 찾은 것이다.
소주 값을 계산하는 경민을 보며 종석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오늘은 그만 헤어지자고 말하지만 경민은 한 잔만 더하고 가자고 한다. 그러고는 동네를 돌다가 학교를 찾아가는데.. 도대체 왜 경민은 15년 만에 종석을 만나자고 한 것일까?
어느 중학교 1학년 교실을 배경으로 폭력에 대한 우화를 그렸다는 점에서 ‘돼지의 왕’은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나 이문열의 원작을 박종원 감독이 영화로 옮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과 비슷하게 읽혀진다. 하지만 이 작품은 경제적 갈등을 폭력 탄생의 한 원인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앞의 두 작품과는 다르다.
남의 자서전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은 종석은 편집인에게 수모를 당한다. ‘네가 무슨 작간 줄 아냐? 자기 돈 내고 자서전 내겠다는 사람의 이야기, 위인전처럼 좀 써주면 안 되냐?’
집에 돌아와서 허기를 라면으로 때운 종석은 아내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다. ‘이 년이 바람이라도 났나?’ 극도로 예민해진 종석은 귀가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집을 나온다. 실은 아내는 종석의 원고를 출판할 출판사를 알아봐 주겠다는 대학교수를 만나 함께 저녁을 먹고 온 것이었다.
돈은 남자의 전부다. 돈이 없는 남자는 위축되고 그의 남성성은 곧잘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길거리를 헤매던 종석은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 있던 경민의 전화를 받고 그를 만난다.
벤처기업 CEO지만 실은 회사는 부도나고 집안에는 압류딱지 천지다. 경민은 홧김에 아내를 살해하고 종석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라스트 홈’에서 부동산업자인 릭은 은행에 집을 빼앗긴 데니스에게 백 명 중 오직 한 명만이 방주에 올라탈 수 있는 거라 말한다. 세상은 방주다. 아흔 아홉 명을 위한 세상은 없고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한 세상만이 존재한다. 신이 세상을 그렇게 창조했다.
경민과 종석이 다니던 학교도 1%만을 위한 세상이었다. 학교의 권력이란 권력은 단1%만이 쥐고 있었으며 1%의 세상에 도전한 경민에게 학교는 퇴학이라는 선고를 내린다.
철이는 1%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악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1%가 가지고 있는 건 1%도 99%도 아닌 100%다. 철이는 학교를 상대로 복수극을 계획하지만 이어 없게 어긋나고 만다.
경민은 그 날의 진실을 말하고자 종석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한 때 자신들이 받들었던 우상의 병신 같은 모습. 하지만 우상이 병신이 되는 걸 절대로 두고볼 수는 없었다.
경민은 종석에게 자신이 그 날 본 것을 말하고 종석은 경민을 학교 옥상에 두고 도망치듯 교정을 벗어난다. 그 때 들려오는 쿵하는 소리.
‘돼지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위해 살을 찌우는지 몰라, 도살장에 가서야 돼지들은 깨닫지, 자신의 살이 자신의 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중1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철이가 경민과 종석에게 어깨들을 가리켜 한 말이다.
세상은 어깨들이 여러 겹으로 두르고 있지만 그들은 모른다. 실은 자신들이 누군가의 고기라는 걸.
2016.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