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해서 즐겁고 해서 괴로운 것이 남녀간의 사랑이다. 그런가 하면 주고파서 못 견디는 것이 사랑이며, 받고파서 가슴앓이 하는 것도 사랑이다. 또 지나치면 화(禍)가 되는 것도 사랑이오, 부족해서 불행의 근원이 되는 것도 사랑이다. 도대체 사랑이란 어떤 모습일까?
여기 사랑의 한가지 모습이 있다. 미국 동부 보스턴에서 가까운 어느 해안 저택에 로라(줄리아 로버츠)와 마틴(패트릭 버긴)이 살고 있다. 마틴은 투자회사의 상담역으로 일하는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유능한 남편이다. 또 한날 한시라도 로라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부인을 끔찍이 사랑하는 남편이기도 하다. 부인 외에 즐기는 것이 있다면 베를리오즈의「환상교향곡」뿐. 그는 심지어 부부관계를 가질 때조차 이 곡을 들어야「일」을 잘 치를 수 있는 사람이다.
로라는 전형적인 가정주부. 젊고 매력적일뿐더러 남편 받들기는 우리나라의 조선시대 여인네보다 더하면 했지 덜하진 않다. 이쯤되면 둘은 겉보기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커플인 셈이다.
이렇게 잘 어울리는 한쌍의 커플이 살고 있는 호젓한 바닷가에 어느 날 존이라는 외과 의사가 휴양차 찾아온다.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존을 만난 마틴은 부인이 아름답더라고 존이 무심코 한말에 몹시 흥분, 집으로 돌아와서 로라를 사정없이 구타한다. 얇은 애정막(膜)으로 포장된 무시무시한 소유욕을 발현한 것이다.
마틴은 평소에도 자기 취향에 거슬리는 것은 참지 못하는, 예를 들면 욕실에 수건들이 가지런하게 걸려 있지 않다거나 찬장속에 통조림이나 그릇들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매우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데 마틴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사소한 일들이 로라에게는 커다란 정신적 형구(形具)로 작용하고 있을 줄이야.
그날 저녁 존과 바다를 유람하기로 약속한 마틴은 로라와 함께 요트에 오른다. 달은 밝고 물결은 잔잔해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 속에서도 구명조끼를 걸친 로라의 표정은 밝지 않다. 그런데 요트가 해안에서 제법 멀리 떨어졌을 때 달빛이 먹구름에 가리고 파도가 높게 이는 것이 아닌가. 폭풍우가 몰아친 것이다.
비바람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으려 돛을 잡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마틴과 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로라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로라... 로라... 정신 없이 외쳐 보지만 바다는 로라의 소재를 알려주지 않고 처얼썩 처얼썩 요트를 때릴 뿐이다. 달려 온 해양구조대와 밤새 바다를 뒤져 보았지만 건져 올린 것은 로라가 입고 있던 구명조끼 뿐.
그 후 로라의 장례식을 마치고 마틴이 일상 속에서 평온을 되찾아 가던 어느 날, 로라의 수영강습소 친구라며 마틴에게 걸려 온 전화는 영화의 흐름을 일순간에 바꿔 놓는다.『집사람은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를뿐더러 배운 적도 없는데요.』『아니예요. 로라는 우리들 중에 가장 수영을 잘했어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마틴은 그 후 눈에 불을 켜고 로라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먼저 가본 곳은 앞을 못보다 돌아간 로라의 어머니가 최근까지 있던 요양원. 이곳에서 로라의 어머니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영화의 앞머리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다며 마틴이 로라에게 힐난하는 장면이 나와 로라가 치밀하게 탈출을 준비했음을 짐작케 하지만 우리 정서와는 잘 맞지 않는 부분이다.) 마틴은 로라가 반드시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오리라 확신하고 로라의 어머니를 찾아오는 모든 방문객을 체크하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
왜일까? 그녀가 다녀가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정말 그녀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일까? 정답은 그녀는 「다녀갔다」이다. 그러면 바다에서 실종된 로라는 어떻게 살아서 마틴의 감시망을 뚫고 어머니의 면회를 다녀갔을까?
사고가 발생했던 날. 그동안 익힌 수영실력으로 무사히 바다를 헤엄쳐 나온 로라는 미리 준비해 둔 옷가지와 약간의 돈만을 지닌 채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중부의 아이오와까지 달음질친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라라는 이름의 도서관 사서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이제는 수건을 아무렇게나 걸어 놓아도 찬장 속의 통조림이 흩어져 있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다. 잃어버렸던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혼자 사는 그래서 조금은 외로워 보이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 사라. 남자들이라면 무관심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은 갖추어진 셈이다.
벤(케빈 앤더슨)은 대학에서 연기를 지도하는, 로라가 사는 집의 옆집에 사는 남자. 이름을 물어도, 어디서 왔는지를 물어도 대답이 없는 비밀투성이인 여인 로라에게 사랑을 느낀다. 로라 역시 개구쟁이 같으면서도 진지하게 자신을 대하는 벤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벤의 집요한 추궁에 드디어 모든 것을 털어놓는 로라. 여기서 벤의 장기가 발휘된다. 간단한 분장만으로 로라를 감쪽같이 남자로 변장시킨 벤. 때문에 로라는 마틴에게 발각되지 않고 어머니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로라의 어머니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 자신을 경찰이라고 속이고 로라의 소재와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낸 마틴은 질투의 화신같은 모습으로 로라와 벤에게 서서히 접근한다.
마침내 다가오는 최후의 순간. 목욕을 하다 수건이 가지런히 걸려 있음을 보고 움찔 놀란 로라는 조심스레 목욕탕 밖으로 나와 집안 이곳 저곳을 둘러보지만 누가 다녀간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내가 너무 과민한 거야.』하지만 기분을 전환하고자 켠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곡은 환상교향곡의 5악장「악마의 축제」. 이미 악마의 축제는 시작된 것이다. 혹시 하며 열어 젖힌 찬장 속에는 모든 통조림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고, 그 순간 모습을 드러내는 마틴.
『우리들은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어.』총을 지니긴 했지만 사용할 마음은 없는 듯 로라를 격정적으로 애무하는 마틴. 그러나 어떻게든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만 하는 로라는 마틴의 급소를 걷어차고 그가 떨어뜨린 총을 주워 이렇게 말한다.『다가오지 말아요.』
로라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설마하는 마음으로 로라에게 다가서는 마틴. 그 사이 재빨리 경찰에게 전화를 거는 로라.『불러 보시지. 잘해야 접근금지 정도의 명령일걸. 당신은 내 아내야.』
마틴이 가슴속에 품은 분노와 질투심보다는 로라의 정신적 공포감이 더욱 컸던 것일까.『방금 침입자를 죽였어요.』라고 전화에 대고 다급히 말하는 로라.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자신에게 다가서는 마틴을 향해 거푸 방아쇠를 당긴다.
낸시 프라이스의 원작 소설을 91년 20세기 폭스사가 극화한 이 영화는 매일 밤 같은 잠자리에서 살을 대며 사는 남편을「적(enemy)」으로 간주한 충격적인 제목으로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던 작품이다.(원제는 Sleeping with the enemy, 1991)
도대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적」들이 존재하는가. 로라역을 맡은 줄리아 로버츠가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으로 급피치를 올리던 시기에 출연한 작품으로 원래는 이미지 관리를 위해 스릴러물에 출연하기를 꺼렸으나 극중 인물(로라)의 캐릭터를 계산한 제작팀의 적극적인 권유로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감독은 조셉 루벤.
이 영화는 보는 내내 관객들을 한가지 의문에 사로잡히게 한다. 로라는 왜 진작 경찰에 보호요청을 하거나 이혼을 결심하지 못했을까. 피날레에 마틴이 로라에게 던진 이 한마디는 의문의 해결점을 찾게 한다.『잘해야 접근금지 정도의 명령일걸.』
흔한 스릴러물 같지만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 작품은 흐름에 필요한 갖가지 복선도 군데군데 깔고 있어 영화가 상영되는 100분 동안 조금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수작이다.
PS1 : 영화 '적과의 동침'에 수록되었던 Brown Eyed Girl. 이 영화를 위해 작곡된 것은 아니고, 원래는 Van Morrison이 67년에 발표했던 곡이다.
PS2 : 영화 속에서는 줄리아 로버츠가 분장실에서 이런 저런 의상과 소품을 착용하며 케빈 앤더슨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 배경 음악으로 사용된다. 감독으로서는 '프리티 우먼'의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블루 하이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