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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복서의 죽음 그리고.. / 김성준..

블루 하이웨이 2005. 3. 5. 09:38

 

지금은 세계 타이틀 매치가 벌어지는지, 누가 챔피언 벨트를 차고 있는지 조차 모르지만 80년대를 전후한 시절, 복싱은 국내에서 단연 인기있는 스포츠였습니다.

 

행여 WBAWBC 타이틀전이 열리는 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목이 터져라 열띤 응원을 하며 TV 중계를 보곤 했죠. 어둡던 시절만큼이나 흐릿한 흑백 수상기로..

 

. 이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줄 모르지만, 36세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복서입니다.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으로 그 때까지 한국인 그 누구도 넘지 못했던 마()3차 방어를 넘긴 선수. 원래는 최경량급 선수는 아니었고 한 체급 위인 플라이급 선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라이트 플라이급 선수로 활약했던 것은 오직 '챔프'를 먹기 위해서 였다는군요.

 

그래서인지 라이트 플라이급 선수치곤 상당히 커 보이던 그가 펼치는 경기는 내내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한 순간도 떠나질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작은 탱크'라 불리우던 태국의 보라싱을 KO시키며 벨트를 따낸 경기를 제외하고 그 후 다섯 차례의 세계 타이틀전을 벌이는 동안 힘든 모습만을 보여 줘 팬들을 '왕짜증'나게 만들었죠.

 

"검은 손을 씻고 흰 손이 되었습니다."

 

김성준이 보라싱을 쓰러트린 뒤, 일성으로 던진 말입니다.

 

'검은 손'. 그렇습니다. 그는 소매치기 출신의 복서였습니다. 거리에서 남의 주머니나 가방을 털던 잽싼 손놀림을 링에서 빠른 주먹으로 바꿔 세계 타이틀을 따낸 것입니다. 복싱에 입문한 뒤 천신만고 끝에 한국 챔피언에 올랐지만 그의 두 손이 받아 든 것은 영광의 글러브가 아니라 수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자질을 아깝게 여긴 검찰의 도움으로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고 789, 김기수, 홍수환, 유제두, 염동균 이후 한동안 끊겼던 세계 챔피언의 명맥을 이은 것입니다.

 

그때 우리 집에서는 동아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스포츠 면 머리에 큼지막하게 달렸던 기사의 제목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김성준, 롱런 가능성"

 

그 당시 장기 집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우리 국민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또 다른 장기 집권을 기대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김성준에게서 그 가능성을 엿 보았던 것입니다. 이제 막 벨트를 두른 김성준이 그때 보여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러나 세계 챔피언에 오른 뒤로 뒷골목의 사나이가 가진 것은 야수의 눈빛과 근성이 아니라 한계 체중 48.99Kg, 깡마른 사나이의 나약함과 무기력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무엇이 뒷골목의 사내를 절정의 순간에 가냘프고 나약한 청년으로 만들었을까요?

 

하기 쉬운 말로 ''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돈 때문에 근성을 잃어버렸단 얘기죠. 그러나 고작 몇 차례의 세계 타이틀전을 치른 그에게 들어 온 돈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물론 전문가들의 얘기는 다릅니다. 네 차례의 방어전을 치르는 동안 김성준이 보여준 극도의 무기력증은 감량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지나친 감량으로 인해 훈련은커녕 트레이너들이 선수 컨디션 맞추는데 급급했다고 하더군요.

 

세 차례의 방어전을 힘들게 마친 김성준이 네 번째 상대로 지명한 것은 대학까지 나온 인텔리 복서 '나까지마 시게오'였습니다. '장기 집권'의 징검다리로 좀 쉬어 가자고 고른 풋내기였죠. 그때까지 '안방 챔피언'을 면치 못하던 김성준은 상대를 만만하게 봐서인지 모처럼 해외 원정까지 시도합니다. 801, 도쿄 구라꾸엔에서 드디어 김성준의 네 번째 방어전이 벌어집니다.

 

'설마 저런 풋내기 자식한테 지기야 하겠어'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김성준은 역시나 무기력증을 탈피하지 못하고 시종 얻어맞다가 끝내 '챔프'를 내어주고 맙니다. '검은 손'을 씻고 '흰 손'이 되었노라고 고백한지 1년여만에 '빈손'이 된 거죠.

 

그 때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도전자의 이름이 '나까지마'여셔 김성준이 패한 거라고..^^

 

그 후 박찬희로부터 WBC 플라이급 타이틀을 뺏어간 오쿠마 쇼지에게 도전해서 한 차례 더 특유의 무기력증을 보여준 김성준은 이후 완전히 잊혀졌다가 거의 십 년이 지난 80년대 끝 무렵 갑자기 신문에 등장합니다.

 

그가 한 건물에서 투신자살을 했다는 기사였죠.. '근성' 하나로 소매치기에서 챔프에 올랐던 그도 더 이상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나 봅니다. 잇따른 사업실패와 실연.. 유서에는 누군가를 사랑했노라고 쓰여있었다고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어린 시절 좋아했던 복서의 비참한 말로는 이미 대학생이었음에도 제겐 상당히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십 수년이 흐른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그의 죽음을 가지고 이렇게 글을 쓸 정도이겠습니까?

 

어느 장관은 최근 여배우의 자살 소식에 전태일을 생각했다고 하던데, 저는 그녀의 자살 소식을 듣고 오래 전에 일어난 그의 자살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뜬금 없이 김성준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은 그래서입니다.

 

물론 김성준과 이은주의 삶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만, 죽음은, 죽음은 어떨까요.. 세계 챔프를 지냈던 사내와 전성기 여배우의 죽음. 전 이은주에 대해서는 김성준처럼 글을 쓸만한 지식도 소재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알지 못한다는 얘기죠. 하지만 그녀의 자살 소식을 접했을 때 이상한 충격이 다가왔습니다. 십 수년 전 김성준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김성준이 나까지마 시게오에게 패했을 때처럼 이은주의 죽음을 두고도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과연 김성준이 근성이 부족해서 패했을까요? 이은주가 자신이 보여준 (노출)연기 때문에 괴로워하다 목숨을 끊었을까요?

 

원래 플라이급 선수이던 김성준은 무리한 감량을 해서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을 거머쥐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정녕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감량의 고통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라도 경기를 치러야 하는 현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잇따른 사업 실패와 실연.. 후에 자살에 이르게 된 것도 모르긴 해도 역시 주변 상황이 그렇게 작용했겠죠.

 

감량으로 인한 무기력한 모습이 결코 그가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나 스스로 그린 참 모습은 아니었을 겁니다. 비록 타이틀전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잽싼 주먹을 맘껏 과시하고픈 욕망이 48.99Kg의 사내의 깊은 곳 어딘가에서 꿈틀거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훗날, 사업에도 연애에도 실패한 중년의 사내는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는 선수 시절을 그리며 죽음에 맞닥트렸을지도 모릅니다. 그 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그가 넘을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은주는 어땠을까요? 자살을 통해 벗어버리기까지 그녀를 둘러싼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너무나 일이 하고 싶다고, 1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세상을 향해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죽음의 공포조차 이겨낸 그녀를 견딜 수 없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글을 마치기 위해서는 당장 오늘부터 그녀가 출연한 비디오라도 빌려 봐야겠습니다.

 

2015.3.5 블루 하이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