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쉬 / 무엇이 진짜 쓰레기인가?
내년이면 하계 올림픽이 열리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이하 리우). 이곳의 거대한 쓰레기 매립장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생활 쓰레기들이 악취를 풍기며 쏟아지는 그곳은 아이들의 학교이자 놀이터였습니다. 사회가 토해낸 거대한 쓰레기 산에서 아이들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인생을 배웁니다.
버림받은 아이들은 버림받은 것들로부터 과연 무엇을 얻을까요?
쓰레기장에서 분리 수거를 하며 용돈을 버는 열세 살 소년 라파엘은 어느 날 뜻밖의 횡재를 합니다. 3백 레알(한화로 약 10만원)이 든 지갑을 발겨한 거죠. 이 돈을 친구들과 나누어 가진 라파엘.
그런데 다음 날 경찰이 쓰레기장으로 찾아와서 지갑을 발견하면 1천 레알을 주겠다는 겁니다. 라파엘은 직감적으로 어제 자신이 주운 지갑이 경찰이 찾는 지갑이라는 걸 알아챕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3백 레알이 들어 있는 지갑을 주우면 1천 레알을 주겠다니?
웬만한 아이들 같으면 아니 어지간한 어른이라도 상황이 이러면 지갑을 주웠다며 얼른 경찰에게 돌려줄 텐데 이 맹랑한 녀석들은 내일이면 2천 레알을 부를지도 모른다며 지갑을 돌려주지 않습니다.
다음날 라파엘과 친구들이 쓰레기장에 나오지 않은 걸 수상하게 여긴 경찰은 라파엘이 지갑을 주웠을 거라 단정합니다. 그러고는 녀석을 잡아 경찰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한편 라파엘이 경찰에게 납치된 걸 안 가르도는 마을의 줄리아드 신부(마틴 쉰)를 찾아가 친구를 찾아달라고 애원하고 이때부터 지갑을 찾으려는 경찰과 지갑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아이들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트래쉬’(Trash)는 우리에게는 삼바 축제와 펠레의 나라 정도로만 알려진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의 리우를 배경으로 한 사회 고발극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야기가 그리 낯설지가 않습니다. 경찰이 수첩을 찾는 이유는 지갑 속에 부패 정치인의 협의를 입증할 수 있는 단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첩을 버린 사람은 경찰에게 쫓기던 그 비리 정치인의 보좌관이었죠. 자신의 비리가 탄로 날 것을 두려워하던 정치인은 어떡해서든 지갑을 수중에 넣어야 마음이 편하겠죠.
영화의 주인공은 소년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소년 모험극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쓰레기 분리 수거를 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소년들이 우연히 주운 지갑을 가지고 경찰에 맞선다는 설정은 비록 나중에 그들이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을 해도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쓰레기장에서 배우는 건 아마 정의의 실천이 아니라 생존의 방법 아닐까요?
영화의 배경은 제작사인 워킹 타이틀에 의해 브라질의 리우로 바뀌었지만 원작 소설(Trash)의 배경인 ‘베할라’는 가상의 장소라고 합니다. 원작자인 영국 작가 앤디 멀리건은 필리핀에서 거주하면서 실제로 쓰레기더미를 놀이터 삼아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워킹 타이틀은 무슨 생각으로 배경을 하필 브라질의 리우로 바꾸어 버렸을까요? 브라질의 정치적 환경을 모르니 뭐라 말할 수 없어도 자칫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 영화는 굳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소재입니다. 솔직히 저는 영화가 사건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긴장감을 제외하면 그리 만족할 만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아이들의 행동이 아이들답지도 못하고 공권력을 악으로만 표현하는 것은 우리나라 영화와 닮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표현의 문제보다 우리나라 신문의 정치면보다 재미없는 남의 나라의 가상의 이야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목(Trash)은 중의적입니다. 버려져야 할 이 사회의 진정한 쓰레기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