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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Munich) / 어느 테러리스트의 고뇌
1972년,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뮌헨. 이스라엘 선수단이 묵고 있는 숙소에 무장 괴한들이 침입한다.
이 과정에서 2명의 이스라엘 선수단이 즉사하였으며, 인질로 억류된 9명도 진압 과정에서 모두 사살되고 만다.
이에 이스라엘 정부는 보복을 다짐한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검은 9월단)에게 결코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보복 작업은 비밀리에 그러나 결과는 온 세상이 알 수 있게 펼치기로 한다. 모사드 출신의 에브너(에릭 바나)를 비롯한 정예 요원들이 선발되고 이들은 테러의 배후 인물들을 암살하기 위해 나선다.
사건 초기, 사실과는 달리 인질들은 무사하고 테러리스트들은 사살된 것으로 언론이 오보를 낸다. TV를 보고 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족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테러리스들에게도 피와 살과 눈물과 가족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테러의 배후로 점찍은 인물들은 하나같이 테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물들이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번역해서 낭송회를 가질 정도의 지식인이며, 자상한 아버지이자, 자신을 죽이려 다가온 에브너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먼저 말을 건넬 정도로 평범한 아저씨이기도 하다.
이들을 하나하나 처단하기 직전 에브너와 대원들은 물어 본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겠소?“
"........"
'살인기술자' 에브너는 또 어떤가.
조국이 그를 불렀을 때 에브너의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다. 그런 아내를 두고 에브너는 조국을 위해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살인여정'을 떠난다.
사람을 살해하기 위해 침대 밑에 폭탄을 설치하며 에브너와 대원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출산했소? 아들이오, 딸이오?"
"딸."
이 부분은 군사정권시절 우리의 어두운 뒷모습을 그린 임철우의 소설 '붉은 방'과 흡사하다. 그 시절 '고문기술자'로 불리던 사람들. 그들에게도 피와 살과 눈물이라는 게 있었을까?
고문은 그들의 '일'이다. 그들도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일(고문)을 하며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가족 얘기도 한다.
그들도 피와 살과 눈물로 이루어진 여느 인간과 다름없는 육신과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고된 일과가 끝나면 돌아가 쉴 집과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인 것이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고문기술자'로 만들었을까?
정부에서 지목한 테러의 배후를 찾아내 살해하는 것은 에브너와 대원들의 '일'이다. 그래서 사설 정보원이 아무리 거물급 배후의 소재를 준다고 해도 리스트에 있지 않은 인물이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심지어 암살된 용의자의 가족이 바로 옆에서 자신들을 목격해도 손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로마에서, 파리에서, 베이루트에서 조국을 위한 과업은 착착 진행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에브너는 사설 정보원이 제공한 숙소에서 공교롭게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과 조우하고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도 조국을 위해서 자신들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도대체 자신과 이 아랍인들은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이스라엘의 반격이 시작되자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대사관을 폭발하는 등 더욱 과격한 보복을 시작한다.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악순환...
임무 수행 과정이 길어지며 에브너 팀의 손실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대원 두 명이 암살당한 것이다. 에브너는 화려한 성공의 대가로 이제는 스스로의 목숨조차 보전하기 어려워졌음을 직감한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숙소에 있는 멀쩡한 전화기와 TV를 분해하고 침대의 매트를 칼로 긋기도 한다. 전화와 침대를 이용한 폭발은 자신이 테러 배후를 암살했을 때 사용한 방법이다.
에브너는 7개월간 6명의 용의자를 암살하고 뉴욕의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에브너는 자신과 가족들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테러 배후용의자들의 소재를 살 수 있다는 것은, 역으로 자신의 정보 또한 팔릴 수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에브너가 뉴욕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정부의 관리가 찾아온다. 손톱이 자라면 깎아줘야 한다는 것(이슬람 테러조직은 주기적으로 손을 봐야 한다는 말)이 이스라엘 정부의 방침이었다.
새로운 임무를 부과하려는 관리와 이를 완곡히 거절하는 에브너.
영화는 뮌헨에서 시작해서 뉴욕에서 끝난다. 뉴욕은 지금은 없어진 무역센터빌딩이 있던 곳.
영화 속에서 에브너 팀이 살해에 실패한 테러의 총책임자 살라메는 79년에 살해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뮌헨(Munich)는 1972년 뮌헨올림픽 테러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는 올림픽 테러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자국에 대한 테러에 대해 이스라엘 정부가 보복을 결정하고 비밀 요원들이 마찬가지 방법으로 테러를 자행하는 과정과 그들의 정신적 고뇌에 카메라를 들이 댄다.
뮌헨이 정통적인 헐리웃 영화와 다른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보통의 헐리웃 영화라면 테러에 맞서 싸우는 요원들의 활약을 그렸을 것이다.
영화를 통해 스티븐 스필버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읽기란 어렵지 않다. 보복은 보복을 낳을 뿐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
많은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9.11 이후 미국의 정책을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부시 행정부의 대외 정책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지 않다. 이 영화를 보고 그저 '역시 부시가 잘 못하고 있군' 이라고 생각한다면 애써 만든 영화의 절반만을 소화한 것이다. 만일 이슬람의 과격 테러에 초점을 둔 작품이 나오면 '그쪽이 너무 과격한 거 아냐' 이렇게 평가할 것인가?
이 영화에서 밀도 있게 그려지고 있는 것 하나는 한 테러리스트의 인간적 고뇌다.
스필버그는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영화의 색채에 테러시스트의 고뇌를 덧색함으로써 보다 중후한 색감을 자아낸다.
살인을 거듭하면서 주인공 에브너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의 행위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스티븐 스필버그는 에브너의 고뇌와 고통을 전달하기 위해 그가 해치운 인물들을 하나같이 그저 동네 아저씨에 가깝도록 싱거운 사내들로 묘사한다. 보통의 헐리웃 문법처럼 에브너가 총을 든 테러리스트들과 과장된 총격전이라도 벌였다면 그의 고뇌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테러리스트의 고뇌를 표현하는 에릭 바나의 연기는 훌륭하다. 조국을 위한 굳은 신념으로 나선 살인여정.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살인기계'로 변모한 한 개인의 정신은 파괴된다.
뮌헨은 절제되어 있다. 그렇기에 사실적이다. 에브너 일행이 용의자들을 살해하는 장면은 볼품없기까지 하다.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홍콩 느와르까지 순식간에 총을 빼서 상대방을 쓰러트리는 모습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상당히 지루할 2시간 40분이다.
블루 하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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