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 죽은 한명회가 살린 영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이광수의 단종애사 이후 너무나도 많이 다루어진 소재죠. 한재림 감독의 '관상'(2013)은 이 낯설지 않은 소재를 다시 한번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역사를 비틀 자신이 없다면 백번을 영화로 만들어도 결과가 변하지 않을 이 이야기에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맛을 내야할 터.

 

무엇으로 간을 내야 재탕, 삼탕한 국물을 관객들의 식탁에 다시 올려 놓을 수 있을까요?

 

 

얼굴만 척 보면 그 사람의 길흉화복을 내다 본다는 용한 관상가가 있었으니 김내경(송강호)이라고 했다.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서 붓을 만들며 살아가는 그에게 한양에서 기방을 운영하는 연홍(김혜수)이 찾아온다.

 

심심풀이로 기방을 찾은 양반나리들의 관상을 봐주던 연홍은 천하 제일의 관상가가 시골에 묻혀 산다는 말을 듣고 동업을 청하고자 찾은 것이다.

 

역적의 자식이니 벼슬로 출세하긴 글렀고 돈이나 벌어볼 심산으로 김내경은 연홍을 따라 한양길에 오른다.

 

 

마음에 걸리는 건 과거 급제의 꿈을 못버린 아들 진형(이종석). 네 할애비의 상을 닮아서 벼슬길에 오르면 목이 달아난다는 내경의 경고에도 진형은 글공부를 포기하지 않는다.

 

한양에서 가장 큰 기방이니 고관대작들이 제집 드나들 듯 하고 곧 내경의 소식은 당대의 세력가 김종서(백윤식)에게 전해진다.

 

'나를 도와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느 안전이라고 거부할 수 있겠는가? 내경은 김종서의 추천으로 관리를 채용할 때 관상 보는 일을 한다.

 

 

어느 날, 김종서는 내경을 임금 앞으로 데려간다.

 

'과인의 주변에 보위를 노리는 자들이 많다. 네가 관상으로 누가 그러한지 능히 맞출 수 있겠느냐?'

 

수양대군(이정재)의 관상을 몰래 살핀 내경은 임금에게 수양은 역모를 일으킬 상이 아니라고 아뢴다.

 

 

'관상의 관자도 모르는 내가 봐도 수양의 얼굴에는 야심이 가득하거늘 네 어찌 전하께 그리 아뢰었느냐?'

 

수양을 역적으로 몰려는 계획이 틀어진 김종서는 내경을 다그치지만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병약한 임금이 세상을 뜨고 어린 세자가 보위를 물려 받으니 곧 단종이다.

 

어찌된 일인지 단종은 수양대군을 멀리하라는 김종서보다 숙부인 수양을 더 신뢰한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아는 나이. 몰래 관상책을 펼치며 역적의 상이 어떠한지 살핀다.

 

'전하께서 내 말을 믿지 않으시니 어쩔 수가 없구나. 수양의 상을 역신의 상으로 바꿀 방도가 없겠는고?'

 

마침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수양이 풍토병에 걸렸다는 정보를 입수한 내경은 의원을 가장해서 수양의 처소에 든다.

 

침에 능한 의원을 매수한 내경은 수양의 얼굴에 침자국을 남기라고 한다. 역신들의 얼굴에 있다는 점을 만들기 위해.

 

 

그 즈음, 과거에 급제해서 말직으로 있던 진형은 김종서의 전횡에 대해 임금에게 상소한다.

 

'네가 감히 좌상 대감을 모함해?'

 

김종서의 수하들은 진형의 눈을 멀게 하고 이 사실을 안 진형의 외숙 팽헌(조정석)은 수양에게로 가 김종서의 계획을 낱낱이 일러주는데..

 

 

이상은 영화 '관상'의 시놉시스가 아니라 제가 관상을 보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부분을 살짝 손대 재구성한 것입니다.

 

영화와 다른 부분은 내경이 수양의 상을 역신의 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내경이 (진짜)수양을 보고 대번에 역신의 상이라는 걸 알아채죠. 다만 그것을 임금이 믿지 않자 수양의 얼굴에 점을 그려넣습니다. 전 이 부분이 아쉽더군요.

 

내경이 수양의 얼굴에 점을 찍은 결과 계유정난이 발생한 것으로 설정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영화에서는 어렵게 넣은 점이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합니다. 점이 있든 없든 수양은 역모를 일으키니까요.

 

 

수양의 얼굴에 점을 남기기 위해 종종 기녀의 얼굴에 매력점을 찍어주는 연홍이 시술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 시놉시스처럼 얼굴에 침을 맞고 흉터가 생긴 것으로 했다면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진형의 눈을 멀게 한 건 김종서 측이 아니죠. 계유정난을 반대한 진형은 결국 수양대군의 손에 목숨을 잃습니다. 이 부분도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이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이라면 곱게 늙어 죽은 한명회가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를 당한 것입니다.

 

내경은 자신을 찾아온 한명회(김의성)를 보고 목이 베일 상이라고 했는데 눈을 감기 직전 한명회는 내경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고나서 17년 후 관에서 꺼내져 목이 잘렸으니 내경의 말이 맞은 셈이죠. 제가 보기에 영화 '관상', 인생이 반전(反轉)인 한명회가 살렸습니다.

 

140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은 빈약한 이야기에 비해 너무 길어요. 초반에 제법 스피디하게 전개되던 이야기는 내경이 권력 다툼에 휘말리면서 한없이 늘어지는 감이 들더군요.

 

어차피 역사적 결과에 관심이 있는 관객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내경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어디서부턴가 곁가지기 되어버린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글공부를 하느라 시력이 약해진 아들을 위해 내경이 약초를 찾아 다니는 모습은 오래 전 본 '효자동 이발사'에서 아들을 업고 용한 의원을 찾아 다니던 한모(송강호 분)와 오버랩 되더군요.

 

이런 불필요한 이야기들이 러닝 타임의 상당 부분을 잡아 먹고 있습니다. 이 영화. 제가 다시 쓴 시놉, 어떻습니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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