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상영관 2016. 2. 17. 14:48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1958년 서독의 노이슈타트. 한 소년이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다 어느 건물 앞에서 구토를 일으킨다. 소년은 그 건물에 입주해 사는 중년 여성의 도움으로 안정을 되찾고 집에 돌아가게 된다. 성홍열에 걸려 몇 달을 누워 지낸 소년은 완쾌 후 사의를 표하기 위해 여인을 찾아 간다. 

 

 

자신을 찾아온 소년에게 여인은 외출하려던 참이었다며 옷을 갈아입게 잠시 나가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소년은 문틈으로 여인의 모습을 훔쳐본다. 문득 소년의 시선을 의식한 여인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자 소년은 잽싸게 달아난다. 소년은 열다섯 살이었다.

 

며칠 후 소년이 다시 여인을 찾아 온다.

 

"네가 원하는 게 바로 이 거지.." 여인이 소년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말했다. 

 

 

그 날 이후 소년은 매일 학교를 마치고 여인을 찾아 갔다.

 

"오늘은 무얼 배웠니?" "오디세이.." "읽어 줄래?"

 

여인은 날마다 소년이 읽어주는 책의 내용에 빠져들었다. 먼저 책을 읽고 섹스하기. 그것이 둘의 사랑 공식이었다. 

 

 

여인의 이름은 한나 슈미츠(케이트 윈슬렛). 전철의 차장으로 일하는 그녀는 성실성을 인정받아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전환하라는 통고를 받는다. 하지만 한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다. 소년(마이클, 데이빗 크로스)에겐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8년의 세월이 흘러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전범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피고들은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간수로 일하던 여성들. 아우슈비츠로 보낼 유태인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하던 피고들은 이송 중에 유태인들을 교회에 가두어 불에 타 죽게 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마이클이 한나를 다시 본 것은 바로 그 법정에서 였다.

 

재판은 처음부터 한나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지맨스(독일의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승진 발령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친위대에 자진 입대하여 유태인 수용소에서 간수로 일한 한나의 경력이 문제가 된 것이다.

 

"피고는 왜 폭격 당해 화재가 발생한 교회의 문을 열어 주지 않았죠?"

 

"그 유태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 저의 일이었습니다. 교회의 문을 열었더라면 통제가 되지 않았겠죠. 재판장님,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자신의 일에 충실했을 뿐임을 말하는 한나. 그런 한나의 돌발적인 질문에 말을 잇지 못하는 재판장.

 

"당시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이 누구죠?"

 

피고인석에 앉은 여자들은 한결 같이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며, 한나가 자신들의 책임자였다고 말했다.

 

"당신이 이 보고서를 작성했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전 책임자도.. 보고서를 작성하지도 않았어요.."

 

재판장은 필적을 대조한다며 한나에게 글씨를 써볼 것을 제안한다.

 

떨리는 손으로 펜을 쥔 한나.

 

"아뇨, 그럴 것 없어요.. 그 보고서는 제가 작성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 한나를 보며 마이클은 고개를 떨군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마이클(랄프 파인즈)은 변호사로 성공했지만 기억 속의 여인 한나를 잊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단 한번도 편지를 보내거나 면회를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한나를 위해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보내준다.

 

그렇게 카세트 테이프를 보내주기 시작한지 몇 년이 흘러 마이클은 한나로부터 짧은 답신을 받는다.

 

"꼬마야, 지난 번에 읽어준 책은 정말 훌륭했어."

 

한나는 왜 그제서야 마이클에게 답신을 한 것일까? 

 

 

케이트 윈슬렛에게 2009년 제81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스티븐 달드리 감독)는 크게 세 파트로 진행된다.

 

첫 파트에서 열다섯 살의 소년 마이클은 어머니 또래의 여성 한나와 짧지만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여성은 아들 뻘의 소년에게 호의를 베풀고 소년은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여성에게 접근한다. 열다섯 살의 소년이 가지는 성적 욕망이야 이해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서른 중반의 여성에게 소년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두 번째 파트에서 마이클은 전범재판을 받는 한나를 발견하고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된다. 유태인 학살 당시 한나는 지휘자의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며 보고서를 작성하지도 않았다. 필적 감정으로 법정에서 손쉽게 밝힐 수 있는 일을 한나는 왜 끝내 거부했을까? 

 

 

세번 째 파트에서 마이클은 오래 전에 그랬던 것처럼 한나를 위해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것을 녹음해 한나에게 보내준다. 하지만 한번도 편지를 써서 보내주지 않는다. 

 

 

사람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존심이란 게 있다. 때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과 바꾸기도 한다. 한나는 그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감옥을 택했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는 그녀가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끝내 그녀를 구해주지 않는다. 또한 남자는 그럼으로써 영원히 그녀를 자신이 책 읽어주는 것을 즐기던 첫사랑의 대상으로 잡아두고자 했다.

 

영화는 단순한 스토리에 의외로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십 오세의 소년과 사랑을 나눈 중년의 여인, 수용소 간수를 하면서도 자기 행위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여인, 모두들 용서받지 못할 과거로부터 발을 뺄 때 순순히 교도소행을 받아들인 여인, 주인공 한나 역을 맡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무척 훌륭하다.

 

한나와 마이클, 두 사람의 오랜 인연은 얄팍한 육체적 사랑을 뛰어 넘는 감동을 전한다.

 

PS : 케이트 웬슬렛의 엉성한 노년 분장만 빼고 영화는 수작이다. 원작소설(베른하르트 슐링거 작)에 충실한 연출이겠지만 굳이 소설의 흐름을 그대로 쫓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