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2023. 2. 13. 19:00

아버지의 해방일지 / ‘츤데레’ 빨치산 아버지를 추억하며

 

지리산과 백운산을 누비며 빨치산 활동을 했던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콱 박아 버리고.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로 데뷔했던 정지아 작가의 장편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딸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사흘 동안 일어난 이야기다. 사흘 동안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일화는 과거의 것이다. 즉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다.

 

작가는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을 찾은 아버지의 지인들을 통해 사흘 속에 지난 70년의 세월을 풀어냈다.

 

소설 속에는 평생 동안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꾼 사회주의자이자 유물론자인 빨치산 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던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빨갱이 형 때문에 국민학교도 마치지 못한 작은 아버지, 국민학교 동기동창이지만 나중에 군사 정권하의 교련 선생을 지낸 아버지의 친구,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다친 상이군인, 아버지와 맞담배를 피우던 소녀. 이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국졸 출신이라고 무식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 우리가 아는 잔혹하고 인정머리 없고 철학이 부재한 그런 빨치산이 아니다. 사회주의와 유물론에 대한 깊은 확신이 있다. 작전 수행 중에 만난 경찰을 살려줄 만큼 인간적이고 유머러스 하며 평생 자신을 감시하던 형사와는 술친구가 된다. 혼자 담배 피우는 딸에겐 한 까치 달라고 할 만큼 ‘소쿨’하다.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그러나 베스트 셀러의 주인공이 될만한 인물이다. 딸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쓴 만큼 사실로 받아들이더라도 소설로서 개연성은 떨어진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큰 범주에서 우리 소설의 메인 영역인 ‘사소설’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작가의 내면세계를 따라가는 다른 사소설과 달리 아버지와 이런저런 사연으로 엮인 인물들 사이의 일화를 걸쭉한 남도 사투리로 펼쳐 놓아 소소한 재미는 있지만, 작가가 퍼즐 조각처럼 흩어놓은 이야기들을 모아야 비로소 아버지의 모습에 다가설 수 있다.

 

작가가 본 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은 어떤 그림일까? 작품 속에서 작가는 대한민국을 ‘남한’이라 칭한다. 그 남한은 4년간 빨치산 활동을 했던 아버지를 무려 70년 동안이나 억압했으며 아버지는 70년을 박제된 채 살았다.

 

“사람이 오죽하면 글겄냐.” 모진 세월에 부대끼면서 무뚝뚝해 보여도 실은 모든 사람에게 따듯했던 ‘츤데레’ 아버지. 어쨌거나 이 소설의 힘은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나 싶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정지아는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 권위 있는 여러 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문단이 인정하는 작가지만, 경력에 비해 작가의 순수문학 쪽 필모그래피는 다양하지 않다. 위인전 등 어린이용 책이 더 많이 보인다. ‘빨치산의 딸’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아버지는 작가의 산이다.

 

202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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