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상영관 2024. 7. 20. 15:05

그랑 블루 / 바다로 돌아간 그들

 

라인홀트 매스너(Reinholde Messner, 1944~ )라는 산악계의 전설 같은 사나이가 있습니다.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에 있는 8,000m 이상의 14개 고봉을 완등했는데 그것도 산소통에 의존하지 않고 또 셰르파의 도움도 없이 단독으로 오른 사람이니 말 다했죠.

 

‘벌거벗은 산’이라는 그의 저서를 바탕으로 한 ‘운명의 산 낭가 파르밧’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 사람과 동생 권터(역시 산악인이었으며 낭가 파르밧에서 형과 함께 하산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형제는 앞에 벽이 있으면 돌아가지 않고 넘어가더라고요.

 

 

소개하는 영화는 바다를 소재로 한 뤽 베송 감독의 ‘그랑 블루’(Le Grand Bleu, 1988)입니다.

 

그리스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함께 자란 자크와 엔조. 바다로 아버지를 보낸 자크(장 마크 바)는 돌고래를 가족 삼아 성장합니다. 엔조(장 르노)는 경쟁 상대이지만 한 번도 잠수 실력을 겨룬 적은 없습니다.

 

 

이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 세계 잠수선수권대회 챔피언인 엔조가 자크를 찾아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서 열리는 선수권 대회 참가를 권합니다. 자크를 이기지 않고는 스스로 진정한 챔피언이라 인정할 수 없었던 거죠.

 

드디어 세계 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자크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놀라운 기록을 달성하자 엔조는 자크의 기록에 도전하려 무리한 잠수를 시도하다가 그만 바다로 떠나고 맙니다.

 

 

그런데 바다 영화를 소개하면서 왜 산악 영화 이야기로 시작했느냐고요?

 

산골에서 태어난 매스너 형제에게 산이 고향 같은 존재이듯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함께 자란 자크와 엔조에게 바다는 어머니의 품 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육지는 그들이 잠시 머무는 곳일 뿐입니다.

 

 

엔조가 먼저 바다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자크는 바다의 환영을 보게 됩니다. 천장에 물이 차더니 방안이 바다로 변하고 돌고래가 다가옵니다.

 

육지보다 바다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자크는 바다로 내려가면 다시 올라올 이유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자크를 사랑하는 여인은 그가 자신에게 정착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자크는 자신이 머물 곳이 어디인지를 압니다.

 

 

바다로 돌아간 사내들의 이야기 ‘그랑 블루’는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바다에 빠져드는 작품입니다. 줄거리는 거들 뿐이죠. 프랑스에서 1988년 5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놀라운 흥행 실적을 기록하고 그해 여름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반응은 신통치 못했습니다. 심지어 러닝 타임을 크게 줄인 미국판*을 따로 만들었는데도 말이죠.

 

 

국내에서는 한참 늦은 1993년에 지각 개봉했으며 이후 2013년과 올해 두 차례나 재개봉했습니다. 그런데 상영 시기마다 러닝 타임이 다릅니다. 처음 개봉 당시에는 오리지널 필름보다 20분 정도 짧은 110분 버전으로 상영했다고 하는데, 이후 국내에서 클래식 반열에 오르며 2013년 재개봉 때에는 168분짜리 감독판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오리지널 리마스터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137분의 길이로 관객에게 선을 보였습니다.

 

저는 168분의 감독판과 137분의 오리지널 리마스터링을 감상했는데, 137분짜리를 볼 때는 이야기의 흐름이 뚝뚝 끊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오리지널 필름에서는 자크가 임신한 연인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엔조를 따라 바다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이 나며 긴 여운을 남긴다. 그런데 미국판의 엔딩은 자크가 돌고래와 함께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가족 관계를 중시하는 미국인의 정서를 고려한 편집으로 짐작된다.

 

** 영화의 미국판 제목은 ‘The Big Blue’이다.

 

2024.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