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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전(劇場傳, Tale of Cinema) / 영화와 현실
홍상수 영화의 특징 가운데 하는 제목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나 초기작인 ‘생활이 발견’(2002) 그리고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 같은 작품들을 보고 제목에서 어떤 의미를 얻어내려 한다면 십중팔구 낭패다.
지금까지 홍상수의 작품을 보고 내린 결론은 대부분의 그의 영화에 있어 제목은 그냥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꽃을 보고 왜 꽃이라고 부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꽃은 우리가 그렇게 부름으로써 비로소 꽃이 되었다.
그의 다른 작품과 달리 ‘극장전’(2005)은 제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예외적인 경우다. ‘극장전’(劇場傳)은 영문 제목(Tale of Cinema)이 보여주듯 극장 즉 영화에 관한 이야기일 일수도 있고 다른 한자 표기(劇場前)가 말하듯 극장 앞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수능을 마친 상원(이기우)은 종로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중학교 친구인 영실(엄지원)을 만나 술을 마신다. 술을 많이 마신 두 젊은이는 함께 여관에 들어 관계를 시도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다음 날 여관을 나온 상원과 영실은 약국을 돌며 수면제를 사 모은다. 상원은 말보로 레드 한 갑을 사려하지만 사지 못하고 대신 88 라이트를 산다. 다시 여관에 들어간 두 사람은 수면제를 나눠 먹지만 자살에 이르지 못한다. 먼저 깨어난 영실은 상원을 두고 여관을 빠져나온다.
영실의 전화를 받은 상원의 아저씨 되는 남자(김명수)가 상원을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동수(김상경)는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다가 영화에 출연했던 여배우 영실(엄지원)을 만난다. 영실이 출연했던 영화를 만든 감독의 후배라고 자신을 소개한 동수는 처음 본 영실을 놓치고 싶지 않다.
자신도 영화를 하니 전화번호 달라고 하지만 영실은 ‘다음에’라고 말한다. 실은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사경을 헤매고 있어 영실은 감독의 후원회에 나가야 한다. 영실의 말을 듣고 동수도 선배의 후원회에 나가기로 한다.
영실을 보내고 길에서 시간을 보내던 동수는 역시 선배의 영화를 보고 나오던 친구를 만나 말보로 레드를 피운다.
영화보고 피우냐는 친구의 말에 동수는 원래 피우던 것이라고 한다.
후원회에서 영실을 만난 동수는 영실의 뒤를 쫓아 선배의 문병을 간다. 문병을 마친 두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고 함께 여관에 들어간다.
다음 날 아침 영실은 동수를 남겨 두고 혼자 여관을 나온다.
흔히 영화를 현실의 반영이라고 하지만 실은 현실이 영화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또 관객은 영화를 보고 영화 속 남녀 주인공과 로맨스를 꿈꾸기도 한다.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은 이와 같이 돌고 도는 영화와 현실의 상관관계를 그렸다.
앞부분의 이야기 즉 상원과 영실의 이야기는 영화 속 영화다. 영화 속에서 동수의 선배인 감독이 영실을 출연시켜 만든 영화다. 극장은 사경을 헤매는 감독을 위해 회고전을 기획했고 영화를 보고 나오다 동수는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영실과 마주친다.
액자 형태의 틀을 가진 영화의 경우, 영화(현실) 속에서 영화 속 영화로 들어가는 방식이 일반적인데 ‘극장전’은 반대로 영화 속의 영화에서 현실로 빠져 나오는 방식이다.
두 가지 이야기를 잇는 끈은 영실이다. 영실은 영화 속 영화에도 출연하며 영화 속 현실에도 출연한다. 비록 영실은 코웃음을 치지만 동수는 영실에게 실은 선배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수의 이야기가 영화가 되고 다시 영화가 동수의 삶에 영향을 미치면서 영화와 현실은 상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과 영화의 상관성을 표현하기 위해 홍상수 감독은 영화 속 영화와 현실을 같은 공간 (종로 일대)에서 촬영했으며 특유의 대구(對句)를 통해 완성했다.
‘극장전’은 홍상수 감독이 자신의 영화사 전원사를 통해 제작한 첫 작품이며, 형식적인 면에서 내레이션을 도입한 첫 작품이다.
영실이 영화 속 영화에서 상원에게 한 대사 ‘내가 니 애인해줄까?’와 영화 속 현실에서 동수에게 말한 ‘여배우라고 해서 특별한 건 아녜요’라는 대사는 영화 속에서 나와 귓가를 맴돈다.
201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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