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북(Black Book)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그려내기에 전쟁은 더 없이 적합한 소재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크건 작건 간에 인간은 자신의 이해 앞에서 곧잘 내면을 드러내곤 한다.

 

그럴진대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전쟁에 이르러서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한 1944년의 네덜란드. 유태계 네덜란드인인 레이첼(캐리슨 반 허슨)은 독일군이 유태인 색출에 나서자 가족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지만 발각되어 가족을 모두 잃고 만다.

 

유태인들을 몰살 시킨 후 그들의 돈과 금붙이를 챙기는 독일군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레이첼은 레지스탕스와 연계된 농민에게 발견되어 반나치 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녀에게 부여된 임무는 나치 장교를 유혹하여 고급 정보를 빼는 일.

 

의도적으로 독일군 대위 문츠(세바스티안 코치)에게 접근한 레이첼은 그와 몸을 섞고 독일군 기지 내에서 문서를 작성하는 비서일을 하게 된다.

 

레이첼의 활약으로 네덜란드를 탈출하려는 유태인들을 도와주는 인물이 실은 독일군 중위 프랑켄에게 매수되어 인간장사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빼낸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그를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레이첼을 의심하면서도 그녀의 매력에 빠진 문츠 대위와 비록 적군의 장교이긴 하지만 로맨틱 가이 문츠를 사랑하게 된 레이첼. 결코 빠져서는 안 될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적 종말을 암시하고..

 

 

레이첼은 유태인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프랑켄이 개인적인 착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츠에게 흘려 그를 제거하려 하지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문츠가 구금당하는 신세가 된다.

 

게다가 레이첼의 정보를 바탕으로 독일군 기지를 습격하여 붙잡혀 있는 대원들을 구출하려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레지스탕스 측에서는 레이첼을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87년 로보캅을 시작으로 89년 토탈 리콜, 91년 원초적 본능으로 이어지는 폴 버호벤의 필모그래피는 한 때 그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감독이었음을 말해주는 훈장이다.

 

하지만 95'쇼걸' 이후 폴 버호벤은 폭력성에서든 선정성에서든 전 세계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칠순을 맞은 폴 버호벤이 6년 만에 신작을 가지고 돌아 왔다. 그것도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 로맨스로.

 

이 영화의 두 가지 기둥 줄거리는 '전쟁''사랑'이다. 하지만 폴 버호벤은 이 흔한 공식만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지만 전쟁 장면은 초반부에 독일 공군의 공습 장면이 살짝 나오는 것이 전부다. 또 전쟁에 의해 찢어진 사랑을 내세워 관객들에게 눈물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럼 이 영화는 대체 어떤 영화인가?

 

 

폴 버호벤은 전쟁과 사랑으로 포장된 영화를 통해 인간 내면을 성찰하고자 한다. 등장인물들은 조국과 자유를 내세우지만 정작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내가 존재할 뿐이다.

 

전쟁 당시 독일이 곧 패망할 것이라고 했던 문츠 대위의 발언을 문제 삼아 그를 구금했던 독일군 상관은 독일이 패망하자 연합군에 적극 협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전쟁 당시 결정된 사항이라며 문츠의 처벌을 요구한다.

 

레이첼과 함께 독일군 기지에서 비서일을 하며 때로는 독일군의 성적 노리개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레이첼의 친구는 해방이 되자 이번엔 연합군을 유혹하여 당당히 승전 행사에 참여한다.

 

 

독일군 중위 프랑켄은 탈출을 시도하는 유태인들을 학살하지만 정작 그가 탐하는 것은 유태인들이 남긴 재산이다.

 

전쟁이 끝나자 표창을 받아야 할 레이첼은 독일군에게 몸을 판 창녀라는 오명을 쓰고 동지들의 정보를 팔아넘긴 레지스탕스의 핵심 인물은 전쟁 영웅으로 칭송 받는다.

 

승리는 쟁취했지만 네덜란드 땅에는 조국도 정의도 없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현실이란 다 그런 것이다.

 

 

폴 버호벤 감독이 제2의 샤론 스톤으로 발굴했다는 '캐리슨 반 허슨'은 청순함과 요염함이 혼재된 이미지의 스파이역을 무난히 소화했다.

 

폴 버호벤의 성공적인 귀환을 축하한다.

 

200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