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상영관 2016. 6. 11. 00:03

안개마을 / 익명(匿名)의 섬

 

 

임권택 감독의 1982년 작 안개마을은 고립된 산간마을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성()에 대한 보고서 같은 작품이다.

 

마을의 태반이 같은 성씨이자 타성받이더라도 고종이나 이종 등으로 연결된 경상도 어느 산골의 집성촌에 초임교사로 부임한 수옥(정윤희)은 마을에 도착한 첫날 깨철이(안성기)라고 부르는 남루한 차림의 청년을 보고 흠칫 놀란다.

 

 

 

깨철은 이 폐쇄적인 마을에서 아주 이색적인 존재였다. 누구도 그의 과거를 알지 못했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은 조금 모자라 보이는 깨철이를 빙신이라고 불렀는데 사실 그것은 자신들이 깨철이에 비해 어떤 면에서든 우월하다는 과시적 표현이기도 했다.

 

깨철이가 특이한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깨철이 같은 존재는 이집 저집의 농사일을 거든다든지 잡일을 하면서 품삯이라도 받아 사는 게 보통의 예이겠지만 깨철이는 그저 배가 고프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밥 좀 다고라고 하든가 밤이면 역시 아무 집에나 찾아가서 자리를 청하는 식이었다.

 

한편 정혼자가 있는 수옥은 남자를 아는 몸이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면 수옥을 찾겠다던 정혼자는 그러나 약속한 날에 나타나지 않았다. 소나기가 내리던 그날 세차게 퍼붓는 빗줄기도 끓어오르는 수옥의 정염을 식히지 못했다.

 

오지 않는 정혼자를 기다리다 비를 피해 방앗간으로 들어간 수옥은 그날 비로소 깨철의 정체를 알게 되는데..

 

 

 

영화 안개마을의 원작은 이문열의 단편 익명(匿名)의 섬이다. 영화는 원작의 줄기에 충실하지만 단선의 짧은 소설을 장편영화로 늘리기 위해 원작에는 없는 에피소드를 삽입했다.

 

뛰어난 원작을 가진 대개의 영화가 그렇듯 안개마을도 원작에 있는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 간의 편차가 심하다. 가령 원작은 수옥(1인칭 소설인 원작에는 라고만 나온다)이 깨철이에게 강간을 당하기 전에는 그의 존재에 대해 마을의 성적인 것과 연관이 있으리란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깨철에 대해 의심을 가진 수옥이 마을 작부에게 깨철을 유혹하게 함으로써 사실성을 크게 훼손하고 말았다.

 

 

영화든 소설이든 이 작품이 말하는 것은 결국 고립된 사회의 성()에 관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깨철이의 존재를 알지만 묵인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혈족들 간에 상피(相避)붙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파트 단지만 벗어나도 개개인이 익명의 섬 같은 대도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마을이라 봐야 수십, 수백 명의 혈족이 고작인 집성촌에서는 비밀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깨철이 같은 존재가 없다면 오랫동안 마을이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깨철이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여야 했으며 알고도 모르는 존재여야 했던 것이다.

 

고립된 섬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그린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서 마을 사람들은 섬에는 섬의 관습이라는 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곳에서 관습은 육지의 법보다 우선한다.

 

마찬가지로 안개마을의 오랜 관습과 전통은 마을을 보전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준수해야 하는 나름의 룰 같은 것이다.

 

쓰는 이는 원작 소설인 이문열의 익명의 섬을 약 삼십 년 전에 읽고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이 소설은 이문열이 1982년도에 계간지 세계의 문학봄호에 게재했는데 쓰는 이는 이 작품이 수상 후보작으로 수록된 1982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접했다)

 

영화는 보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흑산도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문득 이 작품이 생각 나 원작소설을 재독 후 찾아보게 되었다.

 

모름지기 오랜 세월 고립되었던 상주인구 이천 여명에 불과한 그 섬에도 외지인은 모르는 어떤 룰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이 정당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대하는 섬 주민들의 뜻밖의 인식을 보면서 법보다 강한 무엇이 그 섬을 지배함이 느껴지는 건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PS 1 : 영화에는 야주(Yazoo)‘Don’t Go’, ‘Only You’ 등이 백 그라운드 뮤직으로 사용됐는데 산골마을의 분위기와 대비되는 젊은 여교사의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한 의도겠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곡이다. 야주는 1982년도에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은 일렉트로닉 팝 듀오다.

 

PS 2 : 주인공 수옥 역할의 정윤희의 미모는 지금 봐도 무척 빼어나다. 만약 정윤희가 지금 활동했다면 어떤 위상을 얻었을까? 물론 정윤희는 당시 톱스타이긴 했다.

 

2016.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