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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녀 : 요코와 나의 이야기 / 비극을 마주하는 조금은 다른 방식

작가 이순원은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작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알라딘 서점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135개의 결과가 잡힌다. 올라 있지 않은 절판된 작품도 있겠지만, 구판과 개정판, 공저 등이 망라된 결과다.
아무튼 백여 편 이상의 작품을 발표한 작가가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작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백여 편의 작품을 쓴 등단 40주년을 맞은 작가가 꼭꼭 감춰두었던 이야기. 도대체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요코와 나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두 소녀’(실천문학사 펴냄)는 남용자(南容子)와 김후득(金後得)이라는 이름을 미나미 요코와 가네야마 고우도쿠로 바꿔 불러야만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소설의 주인공인 후득은 경포를 산책하다가 맨발의 소녀상을 목격하고는 전기가 온몸을 훑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80년 전, 후득에게는 용자라는 아니, 요코라는 친구가 있었다. 바닥이 떨어진 신을 끈으로 동여매고 다니던 요코에게 자신은 신지 않는 천황이 하사한 고무신을 주었더라면, 그 일이 없었을까.
소설을 아무리 읽어봐도 고무신 한 켤레가 요코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을 것 같다. 소설에서 고무신은 후득의 용자에 대한 마음의 ‘소금 짐’일 뿐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이라면 후득이 맨발의 소녀상을 보고 전기가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부분에서 작가가 쓰고자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위안부가 되었든 근로보국대가 되었든 그 시절 힘없고 가난한 맨발의 소녀들에게 닥친 국가폭력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완의 비극이다.
그래서일까. 이 비극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넘친다. 그동안 백여 편이 넘는 이야기를 꺼낸 작가가 새롭지 않은 소재의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주목한 지점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었다.
작가는 독자를 참혹한 현장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대신 굴러가는 나뭇잎을 보고도 깔깔거릴 십오 세와 십육 세 소녀의 눈으로 창씨개명과 조선어 사용 금지, 징용, 위안부 동원 등 그 시기에 살았더라면, 우리가 겪었을 이야기를 담담히 펼쳐놓는다.
이순원은 일찍이 단편 ‘얼굴’에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트라우마로 광주를 보여준 바 있다. 이순원은 이 작품에서 화염병과 최루탄, 총탄이 난무하는 현장을 독자에게 제시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비극을 전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같은 재료로 다른 요리를 내듯 익숙한 소재도 어떻게 펼쳐놓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후득이 자신의 어머니임을 작가는 밝히고 있다.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가 작가를 키웠다. 그리고 작가는 이제 그 이야기를 21세기의 독자에게 전했다. 작가의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작가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강릉 방언을 연구하는 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는 살아 있는 강릉 방언을 채집하고자 작가의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고 나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분에게서 어떻게 소설가가 안 나오겠나 싶었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창(窓)이다. 작가가 만든 가짜 현장을 경험하는 것보다 창을 통해서 보는 희비극이 더욱 절실할 수도 있음을 ‘두 소녀’는 잘 보여준다. 그것이 작가의 기술이다.
2025.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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