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의 정치학

 

한동안 소강 상태를 보이는 듯하던 누드 열풍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지난 해 성현아, 권민중, 김완선, 이혜영, 이지현, 함소원 등으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를 강타한 누드 열풍이 올해도 거세게 불어닥칠 모양이다. 이승연 등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 여배우들이 '보여주기 위해' 괌으로 태국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배우들의 누드 릴레이가 계속되는 것을 보면 돈이 되긴 되는 모양이다. 보도 등을 종합하면 여배우들의 누드 개런티는 대략 5억원 내외로 추산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벗어서 확실히 뜬 여배우는 없으며 연예활동의 터미널에 이를 수 있는 리스크를 감안하면 단지 돈 때문에 벗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누드 열풍은 여배우들의 화보 제작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미 무용,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의 무대예술에도 출연자들이 전라로 등장하는 것이 낯설지 않으며 최근에는 일반인들도 누드를 촬영한다고 한다. 물론 피사체로써 앵글에 담기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누드 바람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누드 즉 알몸을 드러내는 것은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고야의 '옷을 벗은 마야부인'을 성냥갑에 인쇄해서 유포했다는 이유로 제작자가 유죄를 선고받은 것이 30여년 전이고, 미야자와 리에의 누드집 '산타페'가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그저 이웃나라의 일로 여긴 것이 십여 년 전이었음을 상기하면 누드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그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의 치마길이가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옷을 벗기는 가장 큰 힘은 사회적 분위기다. 우리 사회에서 노출의 수위가 대폭 높아진 것은 6공화국 들어서다. 지금은 영화 속에서 여배우들이 가슴을 드러내는 정도의 노출은 흔하지만 그 전에는 아무리 에로 영화라고 하더라도 스크린에서 여배우들이 가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6공화국 출범을 전후로 해 우리 사회에 분 민주화의 바람은 영화 제작에도 미쳐 여배우들의 옷을 벗겨 버렸다. 민주화는 억압되어 있던 '표현의 자유'를 부분적이나마 해금시켰다. 이후 90년대 들어 인터넷의 보급과 확산은 누드를 더 이상 금기의 영역으로 남겨 두지 않았다.

 

복식이 체제와 질서 관습 등을 나타내는데 비해 누드는 원래 저항의 상징이자 의미를 담고 있다. 전쟁에 반대해서도 벗고 모피 제품의 불매를 위해서도 벗는다. 미국에서는 60년대에 히피들에 의해 모순과 위선으로 가득 찬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의 표시로 등장했다.

 

중세의 권위와 질서에 도전한 르네상스 시대에 누드예술이 꽃을 피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플레이보이지 역시 전후(戰後) 사회적 변화의 물결을 타고 등장했다. 그럼 지금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누드 열풍은 그저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일까?

 

우리 사회는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구 시대의 마지막 열차를 떠나 보내려 하고 있다. 여야 정치인들이 부패와 비리 등의 혐의로 줄줄이 구속되고 있으며 각 당은 지난 대선자금에 대한 조사를 받고 있다. 국민들은 정치권을 덮고 있는 검은 베일을 차제에 걷어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업에는 회계장부의 분식을 지울 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은행은 재무상황을 낱낱이 공개해야만 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정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누드 열풍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바람()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베일을 벗고 알몸을 드러내는 일은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실오라기 하나 없는 우리 사회와 정치권의 완전한 누드쇼를 감상하기 원한다. 배우들도 필요하면 벗기를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숨기고 가리고 정숙한 척해도 그대로 보아 줄 국민들은 없다. 어차피 이제는 가면을 내리고 발가벗어야 사는 사회인 것이다. 정치권에도 강력한 누드 태풍이 불길 기대한다.

 

20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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