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상영관 2004. 9. 14. 10:19

애수(哀愁, Waterloo Bridge)

 

 

모든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한 해인 1914, 런던의 워털루 다리를 지나던 영국군 대위 로이 크로닌(로버트 테일러)은 때맞춰 울려 퍼진 공습경보에 놀라 핸드백 속의 내용물을 쏟고 당황해 하던 마이라 래스터(비비안 리)를 도와 지하철역으로 대피한다.

 

로이의 말대로즐거운 대피시간을 보낸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 육군 대위라는 것과 지금 올림피아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무용극의 발레리나라는 사실 정도만을 확인한 채 헤어진다.

 

그날 저녁,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던 마이라는 우연히 객석에 앉아 있는 로이를 발견하고는 당황하여 실수를 저지르나 동료들의 도움으로 별탈 없이 극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단장인 기로와 부인에게는 몹시 눈에 거슬렸던지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는데 이 때 로이가 살짝 전한 쪽지가 발각되어 기로와 부인의 노여움은 더한다. 연애는 자유지만 공연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이라의 절친한 친구인 키티의 도움으로 재회한 로이와 마이라는 캔들클럽에서 그 유명한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 Farewell Waltz)이 흐르는 가운데 다정하게 춤을 춘다.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로이는 전선으로 나가야 할 처지. 음악이 멈추지 말았으면. 시간이 이대로 정지돼 버렸으면... 서로가 사랑하고 있음을 감지한 두 연인은 뜨거운 입맞춤을 나눈다.

 

다음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 허전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던 마이라는 자신의 숙소로 찾아온 로이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이가 탈영이라도 했나? 그러나 로이의 설명인 즉, 일기불순으로 출정이 48시간이나 연기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마운 비가... 두 사람은 비에 젖는 줄도 모르고 다시 입맞춤을 나눈다.

 

우리 결혼합시다.』『?』『격식을 지키면서도 신속히 결혼식을 치러주는 교회가 있소.』『우린 아직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부모님은?』『돌아가셨어요.』『생전에 아버지 직업은?』『선생님.』『그럼 됐소. 아참, 그런데 성이 뭐죠?』『래스터, 마이라 래스터.

 

그러나 둘이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결혼식을 올릴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다시 오시오.자신은 전장에 나가야 될 현역 장교의 신분이라는 것. 그래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부탁해 보았지만 교회의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사제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더 있잖은가. 아쉽지만 로이와 마이라는 내일을 기약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 날 저녁, 동료들의 축복을 받던 마이라는 다급히 걸려온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작전이 변경되어 자신은 지금 곧 워털루역을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와 줄 수 있겠소?

 

대합실에서 초조하게 마이라를 기다리는 로이. 주위는 온통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무사를 비는 가족들과 병사들로 북새통인데, 마이라에게 어떤 사정이 생긴 것일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기차에 몸을 싣는 로이. 여기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연출된다.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가운데 목을 차창 밖으로 길게 빼고 아쉬운 표정으로 개찰구 쪽을 바라보는 로이. 이 때 사람들을 헤치며 달려오는 마이라. 먼저 상대방을 발견한 쪽은 로이였다. 마이라, 마이라... 로이, 로이! 세상의 몇이나 되는 연인들이 이런 이별을 해보았을까.

 

이날의 숙소 이탈로 인해 무용단에서 해고된 마이라와 기로와 부인의 처사가 지나치다며 대들다 역시 해고된 키티가 싸구려 자취방으로 함께 옮긴 뒤 막막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마이라는 로이로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그녀를 만나러 고향 스코틀랜드로부터 런던으로 올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는다.

 

장래의 시어머니를 만나러 설레는 마음으로 레스토랑에 나간 마이라. 로이의 어머니를 기다리던 그녀는 우연히 펴든 전사자 명단에서 로이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실신하고 만다. 웨이트리스의 도움으로 겨우 깨어난 마이라. 그러나 마음을 추스릴 수 없는 그녀는 로이의 어머니 앞에서 실수를 거듭하게 되고 사정을 모르는 로이의 어머니는 낙심한 채 런던을 떠난다.

 

그 후 키티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한 마이라는 친구가거리의 여자로 전락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전쟁통에 일자리를 구할 수 없던 그녀 역시 키티를 따라 거리로 나선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1년 후, 이제는 능란하게 남자를 유혹할 줄 아는 마이라는 상대를 구하러 월털루역에 나갔다가 귀환병들을 만나게 된다. 누굴 붙들까. 이 남자, 저 남자 살피는 마이라.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죽은 줄 알았던 로이가 한 무리의 귀환병과 함께 플랫폼을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마이라! 당신이 어떻게 알고서?』『친구를 만나러...』『혹시 남자?』『아니요.』『그럼 됐어. 당장 우리 집으로 갑시다. 난 독일군에게 붙들렸다가 탈출했다오.

 

사랑하는 남자와 마차를 타고 입성한 스코틀랜드의 대저택. 기품 있어 보이는 사람들. 그러나 초라한 자신을 발견할 기회도 주지 않고 한없는 애정을 표시하는 마음씨 좋은 시댁 식구들. 그리고 추억의 올드 랭 사인.

 

마이라, 그 땐 정말 미안했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마이라를 가리켜 딸이라고 부르는 로이의 어머니. 순수함 앞에서 더러운 과거를 숨겨야 하는 괴로움. 순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정화(淨化)된 감정. 결국 마이라는 로이의 어머니 앞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스코틀랜드를 떠난다. 로이에게는 비밀로 해달라는 말을 남긴 채.

 

그 후 로이가 마이라를 찾아 런던의 이곳 저곳을 다닐 때 마이라는 워털루 다리 위를 걷고 있었다. 로이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던 곳. 전선의 급박한 상황을 말해주듯 군용 차량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행렬처럼 마이라의 머리 속에서도 로이와의 추억이 이어지고 있으리라. 일순, 급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차량 행렬. 그녀의 추억도 그 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세기의 미남 미녀인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가 주연한애수(Waterloo Bridge)는 연애영화의 전범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로버트 셔우드의 희곡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원래 1931년에 한번 만들어졌으나 실패했다가 1940년에 머빈 르로이 감독에 의해 새로이 제작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1940년이면 2차 대전이 발발한 직후이니 1차 대전이라는 영화 속의 시대 배경과 개봉 당시의 시대 상황이 관객들의 가슴속에서 혼재되어 보다 큰 감동을 일으켰을지 모를 일이다. 이 영화가 국내에 개봉된 시기가 또한 6.25전쟁 중이었다고 하니 역시 전쟁 덕을 봤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 속의 일이 정말 영화가 아닐 수도 있던 시대였던 셈이다.

 

이 작품의 원제목워털루 브리지를 그저 우리말워털루 다리로 옮기자면 아무래도 영화의 이 살지 않는다. 이 영화에 애수(哀愁)라는 제목을 입힌 것은 썩 잘 된 작명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내용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영화에서 다리가 갖는 의미는 보다 각별하다. 다리는 격지간을 이어주는 매개물이다. 그렇다면 로이와 마이라라는 생면부지의 두 남녀가 다리 위에서 만났다는 사실은 그저 길을 가다 만난 것과는 달리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연애영화의 전범이라는 것은 이후 제작된 작품들이 이 영화를 얼마나 닮았는지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아서 힐러 감독의 70년작 러브 스토리의 인물 설정을 보자. 남자 주인공 올리버는 앵글로 색슨 계통의 개신교도로서 보스턴 명문가의 후계자. 반면 상대역인 제니는 무일푼의 이태리계 이민 2. 애수의 로이와 마이라를 그대로 닮았다. 다음은 영화의 한 장면. 마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본채가 나타나는 스코틀랜드의 대저택과 자동차로 한참 달려야 비로소 건물 입구에 닿을 수 있는 올리버의 본가. 두 작품이오버 랩됨을 느낄 수 있다.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의 경우, 성공한 사업가와 보잘 것 없는 창녀 사이의 사랑이라는 통속적 멜로물의 보편적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인물 설정에서 애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끝으로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주제가인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다. 캔들 클럽에서 촛불을 조명으로 로이와 마이라가 춤을 출 때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으로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이 곡은 원래 스코틀랜드 지방의 가곡으로 영어로는Old Long Ago라는 뜻이라고 한다.

 

블루 하이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