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에 관한 소묘(素描)

 

지구상에서 '누드' 즉 알몸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모든 동물은 알몸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인간을 제외하고는 알몸으로 살다 알몸으로 죽는다. 오직 인간만이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을 입은 채 죽는다.

 

따라서 알몸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옷으로 몸을 가리는 것을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하는 척도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알몸이 수치스러워 인간이 옷을 입기 시작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옷을 걸치고 나서 알몸을 수치스럽게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착의여부로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후천적 기준일 뿐 선천적인 기준은 아니다.

 

최초의 인간이 옷을 입고 탄생한 것이 아닌 이상 누드의 역사는 드레싱의 역사보다 앞선다. 인류의 역사를 석기청동기철기시대가 아닌 '누드기''드레싱기'로 구분하면 누드의 시대를 접고 '드레싱혁명'이 발생한지 수 만년이 흘렀어도 인류는 필요에 따른 어떠한 진화도 스스로 하지 못했다. 옷은 여전히 피부의 일부가 아니라 겉치레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알몸보다 착의상태를 더욱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인간의 몸은 약하다. 그래서 누드가 갖는 가치는 평화일 수밖에 없다. 알몸의 반전시위가 호소력을 갖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만일 인체가 훨씬 강하게 진화했더라면 인간은 지금보다 훨씬 호전적으로 되었을 것이다. 또한 알몸은 순수하다. 유전자 변형 반대시위에 역시 알몸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가공의 결정체가 바로 알몸이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 가운데 하나가 여성 연예인들의 '누드 릴레이'였다. 얼굴이 널리 알려진 연예인들이 줄줄이 벗었다는 점이 충격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드 그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누드는 오래 전부터 회화나 사진예술의 소재였다. 작가들이 누드를 선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누드의 아름다움은 균형 잡힌 인체미에서 찾을 수도 있으나 누드의 본질적 가치는 지고지순의 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대자연 속에서 우리는 누구나 마음이 편해지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인간의 누드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인체를 강조한 실내누드도 있지만 많은 누드 작품들이 야외에서 제작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해변에서든 숲 속에서든 그 곳에서 인간은 그저 자연의 한 점으로 순화되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 벗은 한 여배우는 과감히 '헤어누드'도 공개하겠다고 수위를 높여 해묵은 예술과 외설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사실 '있는 그 자체'는 절대 외설일 수 없다. 누드 자체를 외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부정이오, 기만이다. 외설의 판단기준은 실제 그대로가 아니라 얼마나 과장하고 왜곡했느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소피아 로렌은 여성의 매력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데 있다고 말했다. 사실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로는 올누드보다는 세미누드 쪽이 훨씬 강하다. 올누드와 달리 세미누드는 반드시 과장의 작업을 거치게 된다. 그렇다면 그저 음모 노출의 유무로써 외설의 기준을 삼는 것은 넌센스다.

 

당국은 '헤어'만은 성역처럼 고수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여전히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긋기 어렵다. 감동이 마음으로 전해지면 예술이고 몸으로 전해지면 외설이라는 어느 유흥주점에 걸려있던 문구가 기억난다. 기실 그 말이 정답인 것이다.

 

201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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