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상영관/스릴러 2015. 9. 19. 00:00

영화 '소름' 그리고 금화아파트

※ 일부 스포일러를 노출하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철거 직전의 한 아파트에 택시 운전을 하는 용현(김명민)이 햄스터 몇 마리와 함께 이사를 온다.

 

그는 인근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자 선영(장진영)과 마주친다.

 

며칠 후 야간영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용현은 편의점에서 돌아오던 선영을 만나 차에 태워준다.

 

 

선영은 노름꾼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날도 용현과 함께 아파트에 들어오는 선영을 보고 복도에서부터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는 남편.

 

그 장면을 목격한 용현은 그러나 조용히 자기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 날 이후 조금 친분이 쌓인 용현과 선영. 선영은 용현에게 하필 왜 504호로 이사 왔느냐고 묻는다.

 

504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한편 같은 층에 사는 이 작가(기주봉)504호에서 벌어진 일을 소재로 소설을 쓴다. 이 작가는 소설의 줄거리를 조금씩 용현에게 들려주고 용현은 504호에서 일어난 일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극중 소설가가 용현에게 들려주는 그 일은 실은 감독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비가 세차게 내리던 어느 날 밤, 용현은 컴컴한 복도에서 피범벅이 된 선영을 본다.

 

 

장면이 바뀌고 용현과 선영은 야산에 시신 한 구를 암매장하고 있다. 구덩이를 파고 아무렇지도 않게 시신을 던져 넣는 용현.

 

급격하게 가까워진 용현과 선영은 잠자리를 함께 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런 두 사람 사이가 못마땅한 선영을 언니라 부르며 따르는 경진(조안).

 

504호에는 경진의 애인이 살고 있었는데 얼마 전 화재로 죽고 말았다. 남자를 구하러 들어갔던 이 작가는 대신 남자가 쓰고 있던 원고 뭉치를 가지고 나온다.

 

30년 전, 504호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웃 여자와 바람난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 어린 아들을 불태워 죽이려 한다. 다행히 살아남은 아이는 커서 어머니의 원혼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영화는 불에 탄 아이가 용현임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소름은 깜짝 반전을 노리며 표피를 자극하는 영화가 아니라 내면의 원초적 공포를 자극하는 작품이다.

 

고아로 성장한 용현은 남편에게 맞아 온 몸이 멍투성이인 선영을 보 순간 묘한 연민을 느낀다. 그런데 선영은 아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는 여자다. 선영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편의점에 들린 첫날 용현은 아이처럼 과자를 산다.

 

선영은 용현이 즐겨 먹는 과자가 자신의 아이가 좋아하던 것과 같은 것이란 걸 안다. 서로 몸을 섞는 용현과 선영은 실은 모성애라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으며 버림받고 학대받은 공통된 경험이 있다.

 

유기(遺棄)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불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난 불도 잘 들어오지 않는 낡고 어두운 아파트. 영화 소름은 버려진 인간들의 고독을 바탕으로 기괴한 이야기를 엮어간다.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채고 그들을 바라보는 경진은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소름끼치는 존재다.

 

 

영화 소름은 장진영을 재발견한 작품이라고 알려진다. 출연 당시 우리 나이로 서른이 되었던 이 중고 여배우는 부산영화평론가협회에서 수상하는 신인여우상을 받기도 했다.(신인의 기준이 뭘까?) 뿐만 아니라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차지함으로써 비로소 스타로 발돋음했으며, 포르투갈 판타스포르토 국제영화제와 스페인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건 바로 사이코패스 택시 기사 역할의 김명민이다. 어리숙해 보이는 마을 청년과 죄의식이 없는 사이코패스를 순간적으로 오가는 그의 표정은 훗날 연기파 대배우로 성장할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 작품은 윤종찬 감독의 데뷔작이다. 3, 4년 터울로 작품을 연출하는 윤감독은 2005년 대작 청연의 메가폰을 쥐었지만 친일 논란에 휘말리며 추락하고 말았다. 부디 연출가로서 그의 재능만은 추락하질 않길 바란다.

 

 

PS1 : ‘소름은 곧 철거가 마무리될 예정인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금화아파트에서 촬영했다. 철거가 완료되면(2015.9.20) 영화의 현장은 사라지게 된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아파트는 그 자체가 스릴러의 훌륭한 미장센이다.

 

PS2 : 쓰는 이가 금화아파트 철거 현장을 방문했을 때(9월초) 이미 아파트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금화아파트는 산꼭대기에 건설되었는데 아랫동네에도 건축물들이 들어서지 않았을 당시(1969) 고지대에 아파트를 지은 이유에 대한 의문은 어느 신문기사를 보고서야 비로소 풀렸다. 이유는 청와대에서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지었다는 것.

 

  실제 금화아파트 철거 현장(2015.9.8)

 

201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