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상영관/폭력탐구 2016. 1. 4. 23:21

이스턴 프라미스(Eastern Promises) / 인간의 본성은 악(惡)인가?

 

 

'이스턴 프라미스(Eastern Promises, 2007)'는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전작인 '폭력의 역사'에 이어 다시 비고 모텐슨을 주연으로 기용해서 인간의 본성에 카메라를 들이 댄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악()으로 태어나서 악()으로 귀화하는 인간의 숙명을 현상(現像)한.

 

 

 

 

런던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안나(나오미 왓츠)는 아기를 낳다 숨진 한 소녀의 유품을 정리하다 러시아어로 쓰여진 일기장을 입수하게 된다. 일기장에서 '트랜스 시베리아'라는 러시안 레스토랑의 명함을 발견한 그녀는 태어난 아기의 연고를 찾아주기 위해 무작정 레스토랑을 찾아간다.

 

안나는 그곳에서 만난 새미온이라는 러시아인 레스토랑 주인에게 일기장의 내용을 번역해 달라고 부탁한다.

 

며칠 후, 안나가 일하는 병원으로 찾아 온 새미온은 죽은 소녀의 아기를 바라보며 원본을 넘겨주면 아기의 연고를 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도대체 소녀의 일기장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기에..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악인들은 모두 선과 악이 교차하는 이중적 모습을 가지고 있다. 런던에서 러시안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새미온은 손녀들에게 직접 바이올린을 지도해 줄 정도로 자상하며 겉보기에는 매우 인자한 풍모를 가진 할아버지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러시아 마피아 조직 '보리 V 자콘'의 보스. 어린 소녀를 강간하고 그 소녀가 낳은 딸을 없애버리라고 할 만큼 비정한 인격의 소유자이다.

 

 

 

 

영화는 음습한 런던의 뒷골목에 있는 평범한 이발소에서 시작한다. 이발소 안에는 손님 한 사람과 그의 머리를 깎고 있는 이발사가 있다. 이발사는 잠시 후 들어온 모자라 보이는 그의 조카에게 손님의 면도를 요청한다. 어렵사리 면도칼을 쥔 청년은 손님의 목을 그어 버린다.

 

다소 모자라기는 해도 이 청년은 면도칼로 사람의 목을 썰 정도로 잔혹한 심성을 가진 사람은 결코 아니다. 과연 이 청년에게 죄의식이라는 게 있을까?

 

이발사에게 청부살인을 부탁한 것은 새미온의 아들 키릴(뱅상 카셀)과 그의 운전수 니콜라이(비고 모텐슨). 새미온이 왜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동지를 살해했느냐고 아들인 키릴을 꾸짖자 조직을 배반한 대가라고 니콜라이가 대신 답한다.

 

니콜라이의 충성심과 용기를 높이 평가한 새미온은 니콜라이를 정식 패밀리로 받아들인다.

 

 

 

 

니콜라이를 연기한 비고 모텐슨은 관객을 악인의 편으로 만드는 연기의 마술을 보여준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전작인 '폭력의 역사'에서 선한 가장에서 일순간 냉혹한 킬러로 변신하는 모습을 소름이 끼칠 정도로 훌륭하게 연기했던 비고 모텐슨은 이스턴 프라미스에서는 미워할 수 없는 악인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시신의 손가락을 잘라내는 니콜라이에게서 관객들은 전율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 이 사내에게 동화되어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악인을 응원하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 속에 악()이 들어 있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새미온이나 손님의 목을 칼로 그어 버린 청년처럼 니콜라이에게도 선과 악이 교차하기 때문일까?

 

 

 

 

새미온은 살인교사를 이유로 조직에서 키릴을 요구하자 계략을 써서 니콜라이를 대신 사지로 내몬다. 사우나에서 아무 것도 몸에 걸치지 않은 니콜라이는 예리한 칼로 무장한 두 사람의 건장한 사내와 처절하게 싸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사우나 격투신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헤쳐야만 하는 이 세상의 진리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악()이 맞다.

 

 

 

 

간호사인 안나는 새미온으로부터 아기를 지켜내고 나중에 자신의 양녀로 삼는다. 새미온의 딸로서 악의 피가 흐르는 이 아기는 '폭력의 산물'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결말에 이르러 상상치 못한 반전을 줌으로써 영화를 신화적으로 치장했다. 사실은 KGB의 비밀요원이던 니콜라이는 새미온 일당을 제거하고 조직을 장악한다. 인간은 무엇으로 태어나서 어디로 가는가?

 

 

 

폭력에 대한 진지한 탐구라는 면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 시리즈는 자연스럽게 유하 감독의 폭력 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비열한 거리'의 병두(조인성 분)는 선한 아들이며 오빠인 동시에 비열한 조폭이다. 그의 얼굴에서는 선과 악의 양면성이 교차된다. 마찬가지로 이스턴 프라미스의 악인들 역시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절대악도 절대선도 존재하지 않으며, 악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