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스나이퍼 / 총의 노래

전쟁터에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만났다. 누가 이길까?

 

정답은..

 

 

 

먼저 쏘는 사람이 이긴다.

 

전쟁터에도 보수와 진보가 있을까?

 

전쟁터는 옛 서부와 같이 폭력과 공포, 본능의 세계다. 그곳에서는 선과 악이 조우하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는 있어도 달리 할 일은 없다. 오직 먼저 쏘아야 한다.

 

 

총의 생리를 잘 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모처럼 전쟁영화 한 편을 들고 팬들을 찾아왔다.

 

텍사스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인간은 세 부류가 있다. 남에게 얻어맞고 사는 양, 남을 때리는 늑대, 양을 지키는 양치기 개가 그것이다. 사람은 양이나 늑대가 아니라 양치는 개로 살아야 한다. 만약 동생이 맞으면 끝장내버리라는 말을 듣고 성장한다.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는 러닝 타임이 비교적 긴 영화이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초반에 들어가 있다.

 

소년은 성장해서 해군에 입대한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배운 사격 솜씨 덕에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은 네이비실의 스나이퍼로 선발된다.

 

911이 발생하자 신혼의 카일은 이라크로 파병된다. 그의 임무는 아군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멀리서 위험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숨과 숨의 사이에 아주 작은 떨림도 없는 순간이 있다.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을 파고든다. 이윽고 하는 총의 노래와 함께 조준경 너머의 적이 쓰러진다. 총의 노래는 너무나 짧아서 그것과 적의 죽음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만 같다. 어떻게 이토록 가벼운 손가락 놀림만으로 수백 미터 밖의 사람을 죽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 블루 하이웨이 총의 노래’ -

 

전설(레전드)이라고 불리는 그 사내가 과연 네 차례 파병되어 천일을 복무하는 동안 손가락 하나로 160명의 적군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을까?

 

세상은 관련이 있는 것들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들의 혼돈이다. 나는 손가락질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멀리 있는 적이 쓰러졌다. 저격수는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할 수도 있으며 동료를 죽이려는 적을 먼저 쏘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 앞에서도 떳떳하다고 말한다.

 

 

크리스 카일은 적의 숨통을 노리는 그 순간에도 본국에 있는 아내와 통화를 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임철우의 걸작 중편 붉은 방을 떠올렸다. 어둡던 그 시절 고문기술자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면서 마누라 얘기도 나누고 새끼 키우는 얘기도 한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인간이라는 단어보다 넓게 쓰이는 말은 없다.

 

 

혹자는 이 영화를 보고 미국 보수주의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리 영화 국제시장이나 변호인처럼 천박하게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아버지의 깃발을 잇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전쟁영화 3부작이라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용서 받지 못한 자에서 보여준 서부의 철학을 계승한 작품이며 선과 악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던진 차원이다.

 

용서 받지 못한 자의 윌리엄 머니와 빌 대겟 가운데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는 이라크의 저격수 무스타파를 배치해 크리스 카일의 행위를 희석한다.

 

 

홀로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아내는 남편에게 부나비는 언젠가 불에 타 죽을 거라면서 제발 그만 인간으로 돌아와 달라고 흐느낀다.

 

크리스 카일은 허트 로커의 제임스 중사처럼 전쟁이라는 마약에 깊이 중독되었을까? 이 지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선택은 캐스린 비글로를 빗겨 간다. 물론 크리스 카일이 실존인물이라는 건 작가가 캐릭터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크게 축소한다.

 

2015.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