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상영관 2015. 8. 31. 04:00

[장진영 추모] 청연 / 그녀, 조선도 일본도 없는 창공으로 날다

 

() 장진영 주연의 영화 청연’(靑燕, 2005, 윤종찬 감독)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여류 비행사라는 박경원의 사랑과 못다 이룬 꿈 그리고 비극적 생애를 그린 픽션입니다.

 

최초의 여류 비행사도 아니고 굳이 최초의 민간여류 비행사라고 그녀를 소개한 것은 사연이 있습니다. 원래 이 영화의 홍보 문안은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이었죠. 그런데 박경원의 친일 문제가 대두되면서 중국군에서 활동했던 독립유공자 권기옥씨가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는 주장이 유족들에 의해 제기되었고 최초의 민간여류 비행사로 홍보 문안이 바뀐 것입니다. 올린 포스터에는 수정 없이 최초의 여류 비행사로 되어 있군요.

 

이 작품은 작품 자체보다는 주인공의 친일 행각 때문에 개봉 당시 뜨거운 논란을 일으킨 영화로 유명합니다. 지금도 국제시장’(2014), ‘연평해전같은 작품들은 영화 자체로는 그다지 정치색이 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자들에 의해 영화 외적으로 뜨거운 논란이 일기도 하죠.

 

그런데 청연 개봉 당시의 논란은 국제시장이나 연평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안티 청연 까페가 개설되어 조직적으로 관람 반대 운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이에 맞서 제작사는 안티 팬을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허위사실이란 청연에 일본자금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럼 영화의 내용을 살펴볼까요?

 

 

 

 

박경원(1901~1933, 장진영 분). 식민지의 소녀입니다. 소녀의 꿈은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지 못한 소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학교에 입학합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택시 운전을 하던 경원은 우연히 친일파이자 조선 최고의 갑부 아들인 한지혁(김주혁)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놀고먹던 한지혁은 부친의 강요에 의해 일본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그 사이 경원은 비행사가 되어 있습니다. 비행 대회에 출전한 그녀는 당당히 1등을 차지해서 요즘 말로 스타로 떠오릅니다.

 

한편 입대했던 지혁은 일본군 장교가 되어 비행학교에 나타납니다. 의무복무 기간을 마치고 원하는 곳에 배치 받았다고 하지만 실은 부친이 을 쓰지 않았을까요? 이건 영화를 본 제 소견입니다.

 

아마도 경원이 보고 싶어서 돌아온 것이겠죠.

 

 

 

 

사랑도 얻고 비행사의 꿈도 이룬 경원의 앞날은 푸른 창공처럼 창창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청년의 한계라는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 막고 있을 줄은 몰랐죠. 결혼하자는 지혁의 청을 한사코 거절한 경원의 꿈은 보다 먼 하늘에 있었습니다. 바다 건너 조선으로, 유럽으로, 태평양으로..

 

이렇게 비행기 타고 다니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왜 경원은 조선 최고의 갑부의 아들인 지혁의 청혼을 거절했을까요? 어쨌든 경원은 우선 재일한인회를 찾아다니면서 비행에 필요한 후원을 부탁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습니다. 일본 비행기 탄다고 매국노라는 소릴 들은 거죠.

 

 

 

 

이즈음 일본을 방문한 지혁의 부친이 조선적색단으로부터 암살을 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비행학교를 찾은 지혁의 부친이 그만 아들과 경원이 보는 앞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거죠.

 

마치 소녀의 꿈처럼 아름답던 영화는 이 때부터 악몽으로 바뀝니다. 영화의 내용도 우울해지지만 이야기가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흐르더군요.

 

지혁은 부친이 조선적색단에 암살된 일본군 장교입니다. 그럼에도 일제는 지혁을 잡아 고문하고 끝내 그로부터 조선적색단원이라는 자백을 받아 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물론 사실이 아니었죠. 지혁은 사실 그다지 군에 있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친일파인 부친에게는 강한 반발심 같은 게 있었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할 위인도 아니고 말하자면 세상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그런 인물입니다.

 

심지어 일제는 지혁의 연인인 경원까지 잡아들여 심한 고문을 합니다. 지혁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죠. 일제는 지혁의 자백을 받아내자 경원은 혐의 없음으로 풀어줍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는 더욱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본과 조선과 만주가 하나라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일제는 일본에서 출발하여 조선을 거쳐 만주까지 날아가는 일만친선비행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조종사로 박경원을 선택한 것입니다.

 

살려주는 대신 이용하기로 한 것이죠.

 

결심을 앞두고 경원은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지혁을 찾아갑니다. 지혁은 자신을 찾아온 경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비행만을 꿈꾸었지 언제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를 구분했냐? 조선이 너에게 해 준 것이 뭔데?’

 

 

 

 

윤종찬 감독이 그린 박경원은 어떤 인물일까요? 적어도 영화만 보면 박경원이 친일을 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한 건 물론 아닙니다. 말하자면 박경원은 식민지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녀가 일만친선비행을 거부했더라면 영웅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일만친선비행기에 올랐다고 해서 친일파라는 욕을 먹어야 할 사정도 딱히 없어 보입니다. 물론 장진영이 열연한 영화 속의 박경원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글은 인물 박경원 평전이 아니라 영화 청연에 대한 리뷰입니다. 아마 개봉 당시 이런 리뷰를 올렸다가는 저도 엄청 혼났겠죠. ㅋㅋ

 

'청연은 친일과 반일 또는 그 사이에 있는 박경원을 그린 영화가 아니라 자아실현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인간을 조명한 작품입니다. 박경원이라는 인물은 그저 소재죠.

 

 

 

 

영화는 비극적입니다. 193387, 푸른 제비라는 뜻의 청연호를 타고 하네다 공항을 이륙한 박경원은 그러나 기상악화로 50분 만에 날개를 접고 맙니다. 산에 추락한 것이죠.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최후는 사실상 자살에 가깝습니다. 연인의 유골을 싣고 하늘을 날던 그녀는 회항하라는 관제탑의 거듭된 요청을 거부하고 끝내 하늘로 돌아가죠. 그녀의 선택이 과연 친일일까요?

 

영화를 떠나 친일 행위를 한 인물이라고 해서 영화화하면 안 된다든가 또는 영화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그리면 실은 이건 우리의 머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독재시대의 사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말로는 민주를 외치고 보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혈관에 놀랍게도 독재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죠. 비판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전에 정부에서 하던 대로 없는 사실을 만들고 색깔 씌우기를 하면 작품을 만들 수가 없어요.

 

 

 

 

제작 기간 3, 순수 제작비만 95억원이 넘게 들었다는 이 영화는 그러나 친일논란에 휩싸이고 관람거부 운동에 직면하면서 추락한 결과, 50만 명의 관객도 모으지 못한 비운의 작품입니다. 스토리에 개연성이 다소 부족한 면도 있으나 그 때까지 만들어진 우리 영화 가운데 가장 스펙터클한 역작입니다.

 

주연을 맡은 장진영과 김주혁은 싱글즈’(2003)에 이어 두 번째로 함께 출연했으며 장진영은 소름’(2001)에 이어 윤종찬 감독의 작품에 두 번 째 출연을 했습니다.

 

열연을 보여준 장진영은 이 작품으로 제26회 영평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많은 상처를 받았을 거라 짐작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식민지 청년의 갈등과 고민을 좀 더 깊이 있게 담았으면 어땠을까 합니다만 아마 이 영화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도 장진영씨의 연기는 참 좋았어요. 연출과 무관하게 그녀의 표정에서 그 고뇌가 읽혀지거든요.

 

 

 

2015.8.27 블루 하이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