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상영관 2014. 1. 7. 01:00

빙우(氷雨) / 그 산에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산악 영화는 산악 영화인데 산이 보이지 않는다.

 

알래스카의 아시아크산. 그 곳에 가면 잃었던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산이다.

 

아시아크 원정에 나선 대학 산악회 선후배인 중현(이성재)과 우성(송승헌). 등반 도중 불의의 사고로 중현이 큰 부상을 입고 두 사람은 눈 속에 갇힌 채 고립되고 만다.

 

중현과 우성이 아시아크를 찾은 이유는 같았다. 바로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우성에게는 그녀가 첫 사랑이었다. 같은 학년이던 그녀는 신입생 때 만난 단짝 친구였다. 남녀 간에는 아무리 가까이 하려 해도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

 

우성은 자신과 그녀 사이에 진공 상태 같은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보이지 않는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 사귈까?’

 

사귀는 것이 뭔데?’

 

같이 영화 보고 커피도 마시고..’

 

우린 이미 그러고 있잖아.’

 

그녀는 거대한 벽이었다. 허락해주지 않으면 오를 수 없는. 어느 날 아시아크로 훌쩍 떠난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중현은 유부남이었다. 산악회 신입생 환영회에서 그녀를 만났다. 아시아크를 그녀에게 소개한 것은 중현이었다.

 

남녀 사이에 사랑의 공식 따위는 없다. 이유 없이 끌리는 것이 사랑이다.

 

그녀는 아시아크처럼 옆모습이 멋진 남자 중현이 좋았다. 유부남이라서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중현은 그녀의 아시아크 였다.

 

산이 좋아 내가 좋아?’

 

중현의 위에 오른 그녀가 물었다.

 

글세..’

 

난 산이 좋아, 산이 훨씬 크지, 질투도 안하고 언제든 만져 볼 수도 있고..’

 

중현은 산이 더 좋다던 그녀를 영원히 아시아크의 품으로 보냈다.

 

 

설산에 고립된 두 사람은 그녀 경민(김하늘)을 생각하고 있었다.

 

빙우’(氷雨, 감독 김은숙, 2003)는 우리나라 영화로는 보기 드문 산악 영화다. 하지만 산악 영화이되 산의 이야기보다는 사랑에 방점을 둔다.

 

산악으로 포장한 멜로 영화인 셈이다.

 

중현과 우성은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서로가 그녀의 상대남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아시아크 원정에 동행한다. 그녀를 잃은 아시아크에서 함께 고립된 두 사람은 차가운 설원의 밤을 보내며 비로소 한 여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잃어버린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는 아시아크 산의 전설이 아니라면 사실 이 영화 빙우는 배경이 바다여도 상관없고 동굴이어도 상관이 없다. 적지 않은 장면이 산을 배경으로 했지만 산의 비중이 크지 않다.

 

사람들이 절벽에서 실족하고 설산에 고립되는 장르영화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이상하리만큼 화면에는 긴장감이 흐르지 않는다. 최근 몇 편의 산악 영화를 잇달아 보았지만 이제야 알았다. 사람이 절벽 끝에 매달리고 추락한다고 해서 스릴이 내 손 끝에 전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만큼 산악 영화는 연출과 촬영에 있어 고난도의 스킬을 필요로 한다. 우리 영화가 기술적으로 무척 비약했다고 하지만 빙우’(2003) 외에 아직 한 편의 산악 영화도 제작되지 않은 것을 보면 산악 영화 촬영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영화는 45억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캐나다 로케로 제작되었지만 등반 장면이 다이나믹하지 못하고 일부 장면은 뚜렷하게 세트라는 것이 드러날 만큼 CG도 정교하지 못하다. 

 

 

게다가 고립된 두 남자의 회상이 현재에 미치는 인과성이 없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진행되긴 하지만 갈등이 없는 평면적인 서사 구조라 이야기의 힘이 없다. 등반 장면이 약하면 멜로라도 흡인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도 저도 밋밋하니 뭐라도 자극적인 것만 찾는 우리 관객의 입맛에 들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시아크는 지도상에는 없는 가공의 산이다. 이 영화에서 실종된 것은 산이며, 정작 조난 당한 것은 바로 이 영화 자체다.

 

 20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