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Le Prix du desir)

 

 

 

세르쥬 노박이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 다니엘 불탄스키(다니엘 오떼유)는 아들 파브리죠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카프리섬으로 떠난다.

 

카프리행 여객선에서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인 밀라(안나 무글라리스)를 만난 다니엘. 그는 근처에 착석한 밀라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내용을 듣는다.

 

"나 오늘 가지 못할 것 같아. ~ 배를 놓쳐서. ~ 더욱 스릴 있잖아. ~ 사랑해."

 

선상에서 그녀는 '배를 놓쳐' 못 간다고 말한다.

 

 

 

 

통화를 마치고 선실 밖으로 나와 그림 같이 펼쳐진 푸른 바다와 하늘을 감상하는 밀라. 그녀의 흰색 스카프가 맑은 바람에 흩날리다 날아간다.

 

스카프를 주워 밀라에게 가져다 주는 다니엘.

 

어느덧 배는 목적지인 카프리섬에 도착했다.

 

"괜찮으시다면 제 차를 함께 타시죠."

 

"그럼 나야 뭐, 고맙소."

 

 

 

 

선상에서의 인연으로 밀라가 부른 택시에 동승하게 된. 다니엘. 차가 카프리섬의 깍아지른 해안 절벽도로를 달리는 가운데 뒷자석에 나란히 앉은 남녀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살며시 손을 뻗어 은근한 터치를 시도한 쪽은 다니엘. 그의 손이 밀라의 손에 가볍게 접촉하자 밀라는 손가락으로 다니엘의 손가락을 쥔다. 사람은 특히 남녀 간은 손 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가.

 

달리는 차 안에서 발생하는 가벼운 손 접촉만으로 남녀 간의 미묘한 심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장 자크 아노 감독이 91년작 연인(L'amant)에서 사용한 예가 있다. 메콩강을 건너는 배 위에서 우연히 아름다운 프랑스 소녀(제인 마치)를 만난 중국인 남자(양가휘)는 자신의 차로 소녀를 바래 주다 손을 조금씩 뻗어 소녀의 손에 가져 간다.

 

가족에게 가는 대신 우연히 만난 미모의 여인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된 다니엘. 다니엘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이 생겨 내일 아침에 가겠다고 말한다.

 

 

 

 

다음 날 늦은 아침, 다니엘이 눈을 뜨자 낯선 여인은 보이지 않는다. 다니엘은 결혼식이 열리는 성당에 가까스로 도착한다. 신부의 긴 주례사가 끝나고 입맞춤을 나누기 위해 돌아서는 신랑과 신부. 그런데 아들과 입맞춤을 나누는 여인은 지난 밤 자신과 격정적인 섹스를 즐기고 홀연히 사라진 여인이 아닌가.

 

뭐가 뭔지 혼란스러워진 다니엘. 아들의 결혼식 순간까지 며느리가 될 사람을 한번도 만나지 말아야 성립되는 이러한 설정은 우리 정서와 맞지 않지만 이 영화는 먼 나라 프랑스 가족의 이야기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서 부모님의 고향이 폴란드의 크루쿠프임을 밝히는 밀라. 다니엘은 자신의 고향도 크루쿠프라고 말한다.

 

 

 

 

한 식구가 된 밀라를 다니엘은 불편해 여긴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아버지인 다니엘을 유혹하는 밀라.

 

"보고 싶어 못 견디겠어요."

 

"그럼 내 아들은.. 난 위험한 게임은 즐기지 않아.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밀라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는 다니엘. 그러나 친구인 에바의 집에서 기다리겠다는 밀라의 전화 한통에 그대로 무너지는 다니엘.

 

밀라가 기다리고 있는 에바의 집에 다니엘이 들어서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는 두 사람.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카메라는 남녀의 정사를 창 밖에서 잡아 주어 관객의 관음증을 유발한다. 관객들이 창문 넘어 그들이 나누는 섹스를 훔쳐볼 수 있다면 영화 속에서도 누군가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거칠 것 없이 관계를 가지는 다니엘과 밀라. 다니엘은 밀라의 집들이에 참석했다가 그녀의 눈빛에 넘어가 짜릿한 섹스를 즐기기도 한다. 손님들로 가득한 집안에서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섹스를 나누는 사이 시어머니가 남편을 찾아 다니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된다.

 

 

 

 

여기까지 보면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륜을 다룬 것 같은 이 영화는 다니엘의 앞으로 배달된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창 넘어 자신과 밀라가 서로를 탐닉하고 있는 한 장의 사진. 사진을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밀라의 친구인 에바.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홀로 에바의 집을 다시 찾은 다니엘은 거기서 오래 전 자살한 친구 폴의 사진을 발견한다. 밀라를 통해 에바의 폴란드 주소를 물어 그 곳을 찾아 간 다니엘은 에바가 죽은 친구의 딸임을 확인한다.

 

오래 전 다니엘은 죽은 친구의 소설 '겨울여행'을 세르쥬 노박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그 사실을 안 폴의 딸 에바는 다니엘에게 5백만 프랑을 내놓지 않으면 그와 밀라의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한다.

 

그렇다면 에바는 다니엘을 파멸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친구인 밀라를 다니엘에게 접근하게 한 것일까?

 

 

 

 

영화 속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상대에게 동성 친구 이상의 애착을 보이는 에바와 밀라가 공모자일 것이라는 관객들의 추측과는 달리 다니엘은 에바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면서도 추호도 밀라를 의심하지 않는다.

 

관객들의 기대대로 에바는 다니엘에게서 받은 돈가방을 들고 밀라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돈가방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는 밀라. 관객들의 기대는 이 부분에서 어긋난다.

 

밀라의 반응을 보고 짐작했다는 듯 에바가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고 묻자, 밀라는 그냥 떠나라고 말한다. 다니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한편, 다니엘이 폴란드에서 고용한 사설 탐정은 에바가 수 차례의 범죄 경력을 가진 문제 여성임을 알려준다. 그런데 탐정이 전해 준 서류에 붙어 있는 사진은..

 

영화는 이번엔 다니엘의 기대를 무너뜨리면서 재반전을 시도한다.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밀라와 함께 고향인 크루쿠프로 떠난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악연을 떨쳐버린 남녀는 격정적인 섹스를 나눈다.

 

섹스가 끝나고 잠들어 있는 다니엘을 두고 나와 그의 원고 서류를 살펴 보는 밀라. 그녀는 서류 뭉치 속에서 아버지 폴이 다니엘에게 쓴 편지를 발견하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이 영화는 중층되는 반전 구조를 가지고 있다. 팜므파탈 밀라를 축으로 한 반전과 재반전에 이어 끝에 가서는 원래 죽은 폴의 작품인 '겨울여행'이 실은 다니엘의 가족사와도 같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임이 밝혀진다.

 

그것이 미안해서 친구는 자살을 택했고 다니엘은 자신의 이름도 친구의 이름도 아닌 필명으로 소설을 출간한 것이며, 밀라는 다니엘을 파멸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니엘 부자(父子)에게 접근했다가 사랑에 빠졌다.

 

영화는 초반부에 다니엘의 필명인 세르쥬 노박을 주제로 한 강연회로 시작한다. 강연회에서 평론가들은 세르쥬 노박의 출세작 '겨울여행'에 나오는 주인공이 세르쥬 노박 자신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친구인 폴이 원래는 다니엘의 작품 소재가 되었어야 할 그의 가족사를 훔쳐서 소설로 만들었다는 마지막 반전이 강한 힘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탄탄한 구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얼개가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이 영화는 끝까지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수작이다. 원래 2004년도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작년 겨울에 뒤늦게 개봉되어 잠시 소수의 스크린에 걸렸다가 내려졌다.

 

영화는 프랑스와 이태리, 풀란드를 오가며 여러 풍광을 스크린에 담았다. 샤넬 향수 모델 출신인 안나 무글라리스는 팜므파탈을 연기하며 스크린을 압도하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개봉 시즌을 고려했음인지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 작품의 프랑스 제목은 'Le prix du desir'. 감독은 로베르토 안도.

 

2007.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