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戀人, L'amant)

 

남녀간의 사랑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국경과 세대를 초월하여 꽃피우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계층 간, 가문간의 갈등으로 괴로운 사랑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을 영화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세대를 뛰어 넘은 남녀간의 사랑을 그린 영화로 특히 국내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 영화로는 불치병에 걸린 소녀와 중년 피아니스트의 사랑을 그린라스트 콘서트(원제 Passion violent)가 있다. 또한 영국의 사진작가 출신인 데이빗 해밀턴 감독의 모던한 영상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로라 여름날의 그림자(Laura Les Ombres De Lete)도 사춘기 소녀와 중년 조각가 사이의 에로티시즘을 농밀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러한 류의 애정을 다룬 영화의 연결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가장 화제가 되었던 영화는 장 자크 아노 감독의 91년 작연인(L'amant)이다.

 

 

작품의 시대와 무대는 1920년 무렵, 프랑스 통치하의 베트남. 사이공에 있는 기숙학교에 다니는 15세 된 프랑스 소녀(제인 마치)는 어느 날 집이 있는 사덱에서 사이공으로 돌아가던 중 메콩강을 건너는 배 위에서 잘 사는 중국인 남자(토니 륭)를 만나게 된다. 모든 남자와 여자의 첫 만남이 그러할까. 먼저 호의를 베푼 쪽은 남자 측.학교까지 내 차로 태워주겠소.(남자는 차에 탄 채 강을 건너고 있었다.) 멋진 정장 차림의 신사여서 일까. 아니면 고급 승용차에 타보고 싶어서 였을까. 아무 생각 없이(?) 남자의 차에 오른 백인 소녀. 중국인 남자의 나이는 32. 베트남에서는 몇 되지 않는 중국계 부동산 재벌의 2세였다. 그는 방금 프랑스에서 경영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듯 창 밖만 응시하는 소녀. 그러면서도 남자가 나이를 물어 봤을 때는 자신이 17세라고 했다.

 

 

처음 만난 모든 남녀 사이를 흐르는 침묵의 강. 뒷 좌석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도 예외 없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소녀는 아편 중독자인 오빠와 병약한 동생 그리고 베트남에서 채석장을 운영하다 죽은 아버지와 베트남 아이들에게 프랑스 말을 가르치며 네 식구의 생계를 근근히 이어가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소녀에게 있어서 집이란 그저 생각하기조차 싫은공포일 뿐이었다.

 

 

침묵의 강을 얼마나 건너 왔을까. 남자는 조바심을 느끼고 조금씩 자신의 손을 소녀에게로 움직여 가기 시작한다. 차의 흔들림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자기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남자가 생각해 주길 바라고 그랬을까. 남자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고 스치는 데도 움직이지 않고 창 밖만 바라보는 소녀. 서서히 자신감을 얻은 남자의 손은 어느 덧 소녀의 손을 움켜쥐기도 하고 깍지를 끼기도 한다.

 

 

아노 감독은 이 장면에서 남녀가 손의 접촉만으로도 얼마나 감정의 극치에 이를 수 있는지(나아가 관계가 밀접해 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스킨쉽이라든가 바디 랭귀지를 활용한 압축적 표현으로 관객의 이해를 구하는 기법을 이미 원시인의 생활을 다룬 영화불을 찾아서(81)에서 시도한 바 있다.

 

 

그날 밤 기숙사의 잠자리에서 친구와 흔히 그 또래의 관심이 되는 화제를 가지고 나지막이 얘기를 나누는 15세 소녀. ()에 눈을 뜨는 시기였던 것이다.

 

 

다음날 학교 앞에서 차에 타고 있는 그 중국 남자를 발견한 소녀는 다가가서 남자가 앉아 있는 쪽의 창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다. 그 후로 남자의 검정색 승용차와 비슷한 차만 지나가도 고개를 돌려보던 소녀에게첫 경험은 영화 속의 나레이션대로 우연히 찾아왔다.

 

 

그 날은 공휴일이었다. 이른 아침 학교 앞에서 남자의 차를 발견한 소녀는 스스로 차에 올라타고는 남자를 따라 중국인 거리에 있는 남자의 거처로 간다.

 

나는 두려워...』『너를 사랑하게 될까봐...』『너는 나를 사랑하니?

몰라요. 말할 수 없어요.

다음에 오자.

그냥 다른 여자를 대하듯이 대해 주세요.

...

 

남자는 책임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불안감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그는 백인 여자와는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정해준 얼굴도 모르는 정혼녀가 있었다. 그래서 소녀의 옷가지를 모두 벗기고 나서도 주저하는 남자. 당당하고 적극적인 쪽은 소녀였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시작한 중국인 청년과 프랑스 소녀는 점차 서로의 성을 탐닉해 간다.

 

 

그 즈음 자기 딸이 중국인과 사귀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소녀의 어머니는 둘의 교제를 반대하지만 중국인이 대부호의 상속자라는 것을 알고 난 뒤로 딸에게 노골적으로 그와 가깝게 지낼 것을 요구한다. 소녀가 추문에 휩싸이고 생활이 불성실한 것을 이유로 학교에서 요청한 면담자리에서도 소녀의 어머니는 성적만 좋으면 됐지 않느냐며 자기 딸의 사생활에 학교가 더 이상 간섭 말아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딸이 중국남자와 사귐으로써 얻는 경제적 혜택에 어두워 모녀간의 인정마저 저버린 것이다.

 

한편 중국남자는 아버지에게 백인 여자와 함께 살게 해 줄 것을 간청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그리고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하는 괴로움에 아편에 빠져들고 만다. 그는 아버지 없는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가 결혼하기 전, 남자의 거처를 찾아 간 소녀는 결혼식 후 딱 한번 만 자기를 만나 달라고 남자에게 요청한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난 다음 다시 남자의 거처를 찾아가지만 남자는 오지 않는다.

 

아마 중국 남자에게 받은 돈으로 이주 자금을 마련했을 터였다. 그 후 소녀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떠나간다. 베트남을 떠나는 날, 배 위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 베트남 땅을 바라보던 소녀는 선착장에서 중국남자의 검정색 승용차를 발견한다. 그리고 베트남이 아주 작은 한 점이 될 때까지 그 점을 바라보았다.

 

몇 십년 뒤. 중년의 여류 소설가가 된 소녀는 중국 억양이 강하게 섞인 한 통의 남자 전화를 받는다. 그 때 당신을 사랑했소. 그리고 영원히 사랑할 것이오.

 

 

불을 찾아서베어로 자연에 대한 깊은 천착을 보여준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상세계에 있어 연인은 한 커브를 그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같은 프랑스의 거장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베스트 셀러이자 84년도 콩쿠르상 수상작인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이 작품은 극중의 정사신으로 인해 포르노라는 눈총을 받기도 했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논쟁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제인 마치와 토니 륭의 정사신에서 과장되거나 자연스럽지 못한 구석은 없다. 영상물에 있어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고 해서 외설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판단의 기준은 오히려 얼마만큼을 가리고 얼마나 과장했느냐 하는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영화에서 소녀의 애정은 세 단계로 전이된다. 중국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의 소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집으로부터 탈피하고픈 성적 호기심이 강한 15세의 소녀에 불과하다. 당연히 남자를 보는 눈도 성적(性的) 대상 그 이상일 수 없다. 다음은 남자를 통해 경제적 원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단계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어머니조차도 남자를 만나길 노골적으로 부추긴다. 마지막은 드러내지 않고 자신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을 때 어렴풋이 느낀 것이다. 그것이 첫 사랑이었다고. 반면 남자의 사랑은 시종이 명확하지 않다. 또한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와 감정에 있어 소녀의 냉정함은 남자를 압도한다.

 

이 영화는 헐리웃 식의 영화문법으로 이해하려 든다면 분명히 재미없는 영화이다. 중층되는 스토리 구조도 없으며 상황 설정에 대한 설명도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영화의 말미에 가면 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고개가 끄덕여 진다. 소녀를 저버린 남자도 섬뜩할 만큼 냉혹한 소녀도 결코 밉지가 않다. 그리고 17세 차이가 나는 남자와 소녀의 맹목적인 정사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가 결코 불결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를 만든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오래 전에 원작자 뒤라스 밑에서 조감독 수업을 받았다는 사실이다.(뒤라스는 한 때 영화감독으로 활약한 적이 있었다.) 아노가 연인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그가 만든다면 잘 해야 아웃 오브 아프리카 정도겠지.

 

 

제인 마치는 제작 당시의 나이가 18세로 원숙한 여인에게서는 구할 수 없는 청초한 모습을 영화 곳곳에 남기고 있다. 상대역인 토니 륭은 우리에게는 양가휘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홍콩 배우. 배역을 서양인의 관점에서 소화하느라 그랬을까. 그의 표정과 연기는 어쩐지 같은 동양인의 시각에서 볼 때는 낯설게 여겨진다.

 

블루 하이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