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쥬 노박의 겨울 여행 / 타인의 삶을 훔치다

 

 

중년의 남성이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카프리로 떠나는 페리 위에서 미모의 여인을 만난다.

 

미모의 여인은 중년 남성이 들으라는 듯 배를 놓쳐 하루 늦을 것 같다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다.

 

카프리에 도착한 남성은 여성의 제의로 같은 차에 동승한다.

 

 

초면의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문학적 상상력이다. 미모의 젊은 여성이 대놓고 유혹하는데?

 

이번엔 남성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배를 놓쳐서 나폴리에서(카프리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나폴리에서 페리를 타야 한다) 자고 가겠다고 둘러댄다.

 

전화를 마친 남성은 한번 뿐이라고 하지만 여성은 대담하게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남성을 향해 눕는다. 이래도 한번 뿐?

 

 

다음 날 남성이 일어나 보니 여성은 온데간데 없었다.

 

서둘러 결혼식장에 도착한 남성. 그런데 신부를 보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을 느낀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 함께 침대에 누워있던 그 여인이 자신의 며느리라니.

 

그 날 밤, 한번 뿐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남성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고 하지만 여성은 그럴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치명적 매력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는데..

 

 

관객들이 뭔가 음모가 있을 거라 짐작할 무렵 영화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든다.

 

중년의 남성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다니엘 볼탄스키(다니엘 오떼유). 세상에는 세르쥬 노박이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며느리이자 연인인 미모의 여성은 밀라(아나 무글라리스)

 

어느 날 자신 앞으로 온 우편물을 꺼내 본 다니엘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알아차린다. 우편물은 자신과 밀라의 정사 장면을 찍은 사진.

 

하지만 며느리인 밀라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다니엘. 곧 이어 그의 예상대로 밀라의 친구인 에바로부터 협박편지가 도착한다. 출세작 겨울여행의 인세로 번 5백만 프랑을 주지 않으면 밀라와의 관계를 폭로하겠다는 것이다.

 

에바는 다니엘의 수많은 히트작 가운데 왜 겨울여행의 인세를 내놓으라고 했을까?

 

 

필름을 되감아서.. 다니엘의 집필실에서 밀회를 나누고 있는 다니엘과 밀라.

 

겨울여행은 누구의 이야기예요?’ ‘당신 생각?’

 

아니, 친구 이야기. 타인의 삶을 훔치는 게 작가야.’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떤 사람이었죠?

 

평범치 않았지, 스물 살에 자살을 했어.

 

 

결국 다니엘은 에바의 협박에 못 이겨 5백만 프랑을 지불한다. 다니엘의 기대와 달리 관객의 예상대로 돈을 나누는 밀라와 에바.

 

이대로 마친다면 도용과 불륜이라는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중년 작가의 이야기로 끝났을 영화는 이 시점부터 관객의 평범한 예상을 비웃으며 반전을 향해 나아간다.

 

 

연극 연출가 출신인 로베르토 안도 감독의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2004)은 범죄와 불륜, 에로가 혼합된 독특한 스타일의 작품이다.

 

팜므 파탈을 연기한 아나 무글라리스는 영화 전체에 매력을 발산한다. 단순해 보이는 손짓이나 눈빛 연기조차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면서 남성 관객들을 다니엘처럼 무력화 시킨다.

 

다니엘과 정사를 벌이는 밀라는 강렬하다. 비가 때리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다니엘과 밀라의 정사는 관객의 관음증을 충족시킨다. 반면 남편인 파브리죠와 정사를 나눌 때의 밀라는 수동적이다.

 

 

스포일러 주의

 

영화는 두 번 반전된다. 한번은 밀라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다. 밀라는 실은 에바이며 그녀는 자살한 다니엘의 친구 폴의 딸이다. 죽은 아버지의 원고를 도용해 세계적인 작가가 된 다니엘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다니엘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게 다가 아니다. 더욱 놀라운 반전에 대한 떡밥은 미리 깔아 놓았다. 타인의 삶을 훔치는 게 작가다.

 

실은 폴이 쓴 겨울여행은 다니엘의 가족사를 훔쳐 쓴 것이었다. 폴은 그것이 괴로워 자살을 했고 다니엘에게 책의 출간에 관한 모든 것을 일임했다. 다니엘이 자신의 본명이나 폴이 아니라 필명으로 겨울여행을 출간한 것은 그래서 였다.

 

 

이 작품의 프랑스판 제목은 ‘Le Prix du Desir’(욕망의 대가)이며, 영문 제목은 ‘Strange Crime’이다. 2004년도 작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극중 다니엘의 필명과 소설 제목을 사용해서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2006년 겨울에 개봉되었다.

 

개봉 당시 국내 소수의 극장에서 소수의 관객들에게만 선보인 이 작품은 우리가 모르는 새 지나간 걸작이다.

 

쓰는 이는 이번에 세 번 째로 이 작품을 감상하였다. 처음 작성했던 리뷰를 링크로 걸어둔다.

 

같은 영화 다른 리뷰 : http://bluehighway.tistory.com/189

 

201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