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상영관 2024. 3. 7. 10:30

자산어보(玆山漁譜) / 조선의 성리학자, 어류도감을 짓다

 

천주교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하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집권하자 노론은 유교적 가치를 부정하는 서학을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발이라고 보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무려 100여 명의 천주교인을 처형하였으며 400여 명은 유배를 보냈다.(신유박해 1801년) 이 가운데는 노론 정권의 눈엣가시 같던 정씨 삼 형제(정약전 : 1758~1816, 정약종 : 1760~1801, 정약용 : 1762~1836)도 있었다. 이때 약전, 약용은 유배되었고 약종은 참수되고 말았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는 천주교 관련 혐의로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설경구)이 어류도감이랄 수 있는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함께 유배된 막내 동생 약용이 전라남도 강진에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의 국가 경영에 필요한 사상서를 집필한 반면, 약전은 흑산도 근처에서 서식하는 어류 등을 관찰하고 이를 꼼꼼하게 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겼다.

 

도대체 한때 잘 나가던 유학자가 어쩌다 물고기에 관한 책을 쓰게 되었을까?

 

 

양반 관료들에게 내려지던 유배형은 어떤 면에서는 힐링과 재충전의 기회였다. 중앙정부에서 방귀깨나 뀌던 벼슬아치가 외방(外方)으로 내려갈 경우, 비록 죄를 짓고 왔다고는 하나 시골 향반이나 원님들에게는 서울의 권세 있는 가문이나 조정에 끈을 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므로 소홀히 대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유배가 끝나고 돌아가는 날에는 다시 조정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에 배소에서 불편함이 없도록 편의를 보아주면 훗날 그에 대한 보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심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재벌 총수를 관리하게 된 교도관의 심리를 생각해 보자.

 

또한 중앙 관료들은 기본적으로 과거 급제자들이라 학식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이들은 서당을 차리고 발생하는 수입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촌구석에서는 볼 수 없는 ‘일타강사’였던 셈이다.

 

 

어쨌든 대부분의 양반 관료들이 유배지에서 푹 쉬면서 한양으로 올라갈 날 만을 기다리는데 비해 정씨 형제는 독서와 사색, 집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약전과 약용 형제도 다른 유배자들과 다를 바 없이 유배 생활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배 기간이 하루, 이틀 늘어나면서 이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산어보’는 흑산도와 인근 우이도 등에서 무려 15년간이나 유배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친 정약전이 흑산도의 어부 장창대의 도움으로 수백 종의 어류와 해조류 따위를 관찰한 기록이다.

 

 

흑산도는 서남해상의 절해고도로서 지금도 한번 찾아가기가 쉬운 곳이 아니다. 1966년에 ‘흑산도 아가씨’를 히트시킨 이미자는 노래를 발표하고서 거이 반세기가 흐른 2012년에서야 흑산도 아가씨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 비로소 흑산 주민을 위한 콘서트를 열었다. 흑산도는 한번 들어가고 나오기가 이렇게 어려운 곳이다. 하물며 이백 년 전에야 사정이 어떠했겠는가. 보이는 것이라고는 넓은 하늘과 바다뿐이고 다른 먹을 것은 부족해도 바다에서 생산되는 것은 풍부했을 터이니 해양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정약전으로서는 심심해서라도 기록을 남겼을 것으로 짐작한다. 소설가 박범신은 벽촌의 초등학교 교사 시절, 긴긴밤의 고독을 이기고자 소설을 짓기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쓰는 건 외로움을 달래는 수단이다.

 

정약전의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그린 김훈의 ‘흑산’(黑山)이라는 소설을 보면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정약전의 술이 많이 늘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모름지기 사실일 것이다. 유배라는 게 일정한 형기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서 곧 풀려 금의환향할 수도 그곳에서 살다 죽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나저러나 술이 늘 수밖에 없었다. 곧 풀려나니 사또랑 함께 관기 끼고 앉아 낮부터 술이나 마시다 돌아가면 되는 것이오, 돌아가지 못하니 울분에 차서 술 마시는 일 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처음엔 정약전 또한 그랬을 것이다. 홍어에 탁배기, 해 넘어가는 바다를 보며 마시는 그 맛이 아주 죽여 줬다.

 

그러다가 동생인 약용으로부터 국가 경영에 필요한 사상을 정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약전은 문득 본인도 뭔가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약전은 동생인 약용은 쓸 수 없는 흑산도 물고기에 대한 생태를 그곳 어민들의 도움을 받아 쓰기 시작했다. 바로 ‘자산어보’다. 책을 쓰다 보니 술 마실 때보다 더욱 시간이 잘 흘러갔다. 쓰는 동안은 외롭지도 않았다. 더구나 주관적 생각을 배제한 관찰서. 거기엔 천주학도 성리학도 없었다.

 

사람들은 정약전이 어민들을 위해 ‘자산어보’를 집필했을 거라고 하지만 이건 개소리다. 만약 그랬다면 과연 그 어려운 한자로 집필을 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바다가 생활의 터전인 어민들은 책상물림인 정약전보다도 바다와 물고기에 대한 것들을 더 잘 안다. 그렇다면 정약전은 철저히 외로워서 그래서 글을 쓴 것이다.

 

 

영화에서 설정한 창대(변요한)라는 인물은 양반의 떨거지다. 아비라 부를 수도 없는 아비를 찾아가 학문을 과시하고 아들로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하지만 궁벽한 섬에서는 스승을 만나기는커녕 제대로 된 책 한 권 구해볼 수조차 없었다. 이때 과거 급제자 출신의 전직 고급 관료가 나타나 “네가 가진 지식과 나의 지식을 바꾸자”고 한다. 대역 죄인이니 도울 수 없다고 하자 약전이 거래를 청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약전은 창대에게 글을 깨우쳐 주고 창대는 해양생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전달한다.

 

이윽고 시문에 통달하게 된 창대는 뭍으로 가서 진사시를 패스하고 아비로부터 벼슬을 얻어주겠다는 약조를 받는다.

 

 

이후 영화는 입신양명의 꿈을 꾸던 창대가 스승이 거처하던 우이도(유배지를 옮겼다)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극의 앞부분이 흑산도에서 해양생물에 관심을 보이는 정약전의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성리학을 통한 출세를 꿈꾸던 창대가 그것을 포기하는 과정이다. 아전들의 수탈과 이를 눈감아 주는 관리를 보며 성리학적 이상사회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영화의 기본적인 얼개는 자산어보의 서문에서 가져왔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창대가 뭍에서 겪는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다. 앞부분과 뒷부분의 결이 다르다. 매끄럽지 못한 뒷부분은 전형적인 이준익 표 ‘이지 고잉’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