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상영관 2024. 2. 11. 10:55

트루 스피릿 / 소녀와 바다

 

제목이 스포일러인 경우가 왕왕 있는데요. 넷플릭스 드라마 ‘트루 스피릿’(True Spirit, 사라 스피레인 연출, 2023)도 그런 경우입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의 제목에서 어떤 느낌을 받으시나요?

 

 

바닷가 출신의 우리나라의 어느 전직 대통령이 생전에 이런 말을 했죠. 걸음을 먼저 배웠는지, 헤엄을 먼저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제시카 왓슨(티간 크로프트)이라는 열여섯 살의 호주 소녀가 있습니다. 별을 보고 잠들고 파도 소리 들으며 눈을 뜨면서 이 소녀는 열두 살 무렵부터 돛단배를 타고 단독 세계 일주를 꿈꿉니다. 아마도 땅에서 생활한 기간보다 바다에서 생활한 기간이 더 많았을 이 소녀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하며 착실히 자금을 모읍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열여섯 살 소녀가 혼자서 돛단배로 세계 일주를 꿈꾸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실행을 떠나 꿈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겠죠. 한서대학교 해양경찰학과 김석균 교수는 ‘해금’(海禁)이라는 저서에서 동양은 해금(海禁)의 역사인 반면, 서양은 개해(開海)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동양의 해금 정책과 서양의 개해 정책이 오늘날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주장합니다. 한중일 동양 삼국 가운데 특히 우리나라의 해금 정책이 가장 강력해서 태종 이래 무려 4백년 간이나 섬을 비워 두는 공도 정책을 폈다고 합니다.

 

비록 개인의 돌출된 행동이라고 해도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했다는 뉴스가 이따금 보도될 때 성공한 사람 가운데 동양인의 경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도전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도전 자체가 없었던 거죠. 여전히 동양은 해금의 문화인 것 같습니다.

 

 

영화 속으로 돌아가서… 왓슨이라는 호주 소녀는 2009년 10월 18일 시드니 항을 출발해서 적도를 넘나들며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을 지나 시드니로 돌아오는 대장정에 나섭니다.

 

한 인도 소년의 태평양 표류기를 그린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e)를 보면 바다의 다양한 모습을 만나게 되는데, 소녀가 마주친 바다도 여러 가지입니다. 아파트 높이의 파도가 치는 격랑의 바다도 있고 거울처럼 잔잔한 고요의 바다도 있습니다. 격랑의 바다든 고요의 바다든 대자연은 인간에게 절로 길을 내주지 않습니다. 대자연을 극복하고 지나갈 때 비로소 길이 생기는 것이죠.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고 뜻한 바를 이룰 경우, 흔히 정복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정복이라는 말은 인간의 오만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자신을 허락할 뿐입니다.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지날 때까지 심각한 위기를 겪지 않은 왓슨은 항해 201일 차에 태즈매니아 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에서 무려 20미터 높이의 파도를 만납니다. 가족들은 왓슨에게 근처 항구에 정박하라고 타이르지만, 왓슨은 그러면 포기하는 것이 된다며 파도를 타고 지나가겠다고 고집합니다.

 

과연 논스톱 세계 일주라는 소녀의 꿈은 이루어질까요?

 

 

저는 영화를 보며 왓슨이 집채만 한 파도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도 왜 항로를 변경하지 않았는지 의아하더군요. 아마도 정해진 지점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목이 알려주듯 영화는 해피 엔딩입니다. 파도에 삼켜져 뒤집어 진 채 해면 아래로 가라앉은 소녀의 작은 배. 도대체 왓슨은 어떻게 대항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궁금하시면 영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는 지난 2월 3일부터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습니다.

 

‘트루 스피릿’의 치명적인 단점은 이야기 구조가 단조롭다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기는 쉽지만 심심한 면이 있죠. 파도가 보트를 왓슨의 작은 배를 덮치는 장면에서는 손에서 진땀이 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모니터로 보는 한계라기보다 연출의 문제인 것 같아 아쉽습니다. 실화라고 하니 혼자서 거대한 파도를 뚫은 소녀는 절대 그렇지 않았겠지만요.

 

2024.2.10